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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cellaneous/People

건축가 승효상

노前대통령 묘역 공간디자인 한 건축가 승효상
글 윤민용·사진 남호진기자 vista@kyunghyang.com
ㆍ“묘지가 일상 가까이에 없어서 도시가 경건하지 못한겁니다”
건축은 땅에 의거해 기록찾고 새로운 무늬를 새기는 작업  

승효상 건축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내후성강판과 노출콘크리트로 지은 사옥 이로재 앞에 승효상이 섰다. 이로재는 이슬을 밟는 집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건축가 승효상(57). 이제 그의 이름은 건축론 ‘빈자(貧者)의 미학’과 더불어 하나의 브랜드가 됐다. 서울대 건축과를 졸업한 뒤 1975년 한국 건축의 거장 김수근 문하에서 건축 실무를 익혔고 15년간 공간건축에서 국립청주박물관과 마산 양덕성당, 서울 경동교회 등의 수석디자이너를 맡았다. 1989년 독립 후 건축사무소 이로재를 열어 지난 20년간 수졸당, 수백당 등의 주택과 웰콤시티 사옥, 쇳대박물관, 대전대 혜화문화관, 부산 구덕교회 등을 설계했고 파주출판도시 코디네이터로 참여했다. 이런 공로로, 2002년 건축가로는 처음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하는 ‘올해의 작가’에 뽑혔고, 2008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 한국관 커미셔너를 맡았다. 2000년대 들어서는 중국에 진출해 베이징 첸먼지역 30만㎡를 재개발하는 설계프로젝트를 따냈고, 만리장성 팔달령 인근에 들어선 부티크 호텔 ‘코뮨 바이 더 그레이트 월’에 아시아를 대표하는 12명의 건축가 중 한 명으로 초청받아 클럽하우스를 설계하기도 했다.

그가 최근 독특한 공간을 디자인했다.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이다. 유홍준 명지대 교수의 추천으로 시인 황지우, 미술작가 안규철·임옥상, 안병욱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건축가 정기용 등과 함께 ‘아주 작은 비석 건립위원회’에 참여해 전체 공간디자인을 맡았다. 산 자가 아닌 죽은 자를 추모하기 위한 공간, 더구나 추모의 대상은 전직 대통령이다. 그간 ‘빈자의 미학’을 설파하며 물신주의에 사로잡힌 한국 건축계를 질타해온 그가 설계한 묘소가 궁금했다. 작금의 한국 건축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오고갔음은 물론이다.

추모글 다 닳아 없어지고 기억만 남는 설계가 마땅

-어떤 연유로 ‘아주 작은 비석 건립위원회’에 참여하게 됐습니까.

“유홍준 교수가 저를 추천했습니다. 사저를 비롯해서 봉하마을 전체의 마스터플랜을 정기용 선배께서 맡으셨는데, 차마 묘소는 직접 당신이 못하겠다 하시더라고요. 워낙 충격을 받으셔서, 제가 맡게 됐죠.” 

승효상이 디자인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의 공간 스케치. 두 개의 물줄기가 삼각형 모양의 대지를 세부분으로 나눠 추모의 마음을 되새기기에는 더없이 좋은 공간이 됐다.

-묘역을 단계적으로 조성한다고 들었습니다.

“전체 그림은 다 그려졌지만 (장례를 치르느라) 시간이 급해서 1단계로 지석만 얹은 상태입니다. 나머지는 추후에 진행하자고 이야기가 된 상태고요. 그래서 지금은 초라하게 느껴질 겁니다. 처음엔 부지 선정을 놓고 많은 논의가 있었는데 사저 뒤편은 개인의 묘로는 적당하지만 전직 대통령의 묘로는 적당하지 않다고 봤습니다. 대개 우리나라의 산소는 산중에 있는데, 산 위가 아니라 낮은 평지에 광장처럼 있는 게 노무현 전 대통령다울 것 같아 지금의 터로 정하게 됐지요. 또 마을 끝부분이면서 사저와 부엉이바위 등 봉하마을 전체를 조망하기에도 좋은 지점입니다. 묘역의 콘셉트는 ‘자발적 이방인을 위한 묘역’입니다. 부지가 1000평인데 의식을 행하기에는 좋은 자리예요. 이곳을 지나는 물줄기는 2개가 있는데 물줄기가 자연스럽게 묘역을 3부분으로 나눕니다. 들어가는 공간, 기다리는 공간, 참배하는 공간으로요.”

-구체적으로 설명 부탁드립니다.

“묘역의 기본 개념은 종묘에서 빌려왔어요. 종묘는 1m 높이로 월대를 쌓고 박석을 깔아놓았어요. 월대는 혼령들이 만나는 지점이자 한없는 비움의 공간입니다. 이걸 형상화하려 했습니다. 노 전 대통령 묘역도 지면에서 1m 정도 들어올려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일반시민들이 쓴 추모글을 새긴 박석을 깔 예정입니다. 새겨놓은 글귀는 시간이 흐르면서 닳아 없어지겠지요. 그게 마땅하다고 저는 봅니다. 세월과 함께 닳아 없어져서 기억만 남는 것 말입니다. 저는 유족과 기념사업회 측에 국민의 신청을 받아 직접 박석을 나르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답을 기다리는 중이에요. 현재는 지석과 묘역을 표시하는 30m 길이의 곡장이 설치된 상태이고 묘역 전체 흙다지기 등의 기반공사는 끝났습니다. 곡장의 재료로는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녹이 스는 내후성강판을 사용했는데 이걸 60m로 늘릴 예정입니다. 묘역 주변에 소나무를 심어야 하고 박석에 추모글을 새기는 과정이 시간이 좀 걸릴 듯한데, 이 작업만 끝나면 금세 완료될 거라고 봅니다. 내년에 1주기에 맞춰 끝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동안 많은 설계작업을 진행하셨는데 망자를 위한 공간을 설계하기는 이번이 처음 아닌가요?

“납골당을 설계한 적은 있지만 이런 류의 묘소는 처음 설계해봅니다. 사실 죽은 자를 위한 공간에 지극히 관심이 많습니다. 세계 각국의 묘지순례를 다니기도 하고 자료도 많이 모았어요. 우리나라의 장묘문화는 뜯어고칠 게 상당히 많습니다. 

들어가고, 기다리고, 참배하는 ‘자발적 이방인을 위한 묘역’

우리나라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죠. 그러나 일본만 하더라도 시내에 묘지가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일상생활 공간에) 묘지가 없어서 도시가 경건하지 못하다고 봐요. 죽은 자와 가까이 있다는 것은 산 자에게 삶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거든요.”

-이제 ‘승효상=빈자의 미학’과 동의어가 될 정도입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여전히 ‘빈자의 미학’은 낯선 개념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미학이 아니라 가난할 줄 아는 이들의 미학이라는 뜻입니다. 돈이 있다고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절제하고 검박할 줄 아는 사람들을 지칭하죠. 집을 지을 때도 남보다 작은 집을 짓고, 남하고 나눌 수 있는 집을 지으라고 하는 게 빈자의 미학이에요. 저는 건축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건축물의 공공적 가치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개인이 자비를 들여 자신의 집을 짓는다 하더라도, 건축주는 건물에 대한 사용할 권리만 있을 뿐 건축물 자체의 소유권은 사회와 시민에게 있다고 봐요. 이를테면 대학로 샘터 사옥 1층을 보십시오. 비어있습니다. 사람들은 거기서 누군가를 기다리기도 하고 대학로 뒷길로 가는 지름길로 이용하기도 해요. 공간을 시민에게 내어주니까 오히려 남은 장소가 돋보입니다. 건축에서 공공적 가치를 키우는 것이 바로 빈자의 미학의 골자라 할 수 있습니다.”

-건축은 건축가의 예술작품인 동시에 자본을 가진 건축주가 있어야만 진행되는 예술이기도 합니다. 건축의 공공적 가치를 말하는 ‘빈자의 미학’론은 건축주들에게 호응을 얻기 쉽지 않았을 듯 한데요.

“물론입니다. 처음엔 공감 받지 못했죠. 건축주와 처음 만나서 ‘이 집은 당신 집이 아닙니다’라고 선언을 하면 욕을 하면서 나가버리더군요. 일감이 없어서 힘들었지만 버티는 데는 김수근 선생 휘하에서 워낙 이력이 났어요. 그렇게 버티다보니 다시 찾아오시는 분들도 계시죠. 지금도 이런 생각에 동의하는 건축주들과 진행합니다.”

-‘빈자의 미학’은 어떤 계기를 거쳐 만들어지고 다듬어졌습니까.

집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사회와 시민에게 소유권

“제가 공간건축에서 15년을 있다가 독립했습니다. 김수근 선생 생전에 12년, 사후에 3년 있었지요. 15년간 김수근 건축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제 건축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해서 독립 후 2년 정도는 굉장히 방황했습니다. 어느날 달동네를 지나가는데 그 풍경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사실 제가 어린 시절 달동네에서 살았거든요. 한동안 이걸 잊고 있었던 겁니다. 그걸 다시 생각하니 몸이 편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달동네란 달동네는 모두 보러 다녔습니다. 달동네 곳곳에 건축의 지혜가 담겨 있음을 알았습니다. 가난하니까 작고, 나눌 수밖에 없겠죠. 골목길이 마당이 되고 놀이터가 되고 창고가 되는 등 달동네에서 공동체를 봤습니다. 현대건축이 다시 집어내야 할 덕목이 이것이 아닌가 생각했고 파헤쳐보니 이미 해외의 건축 선각자들은 이런 작업을 하고 있더군요. 그때부터 다시 건축을 시작했다 할 수 있습니다. ‘빈자의 미학’이라는 콘셉트를 세우고 거기 맞춰 건축을 하겠다 했죠.”

-개인적으로 여태껏 진행했던 건축작업 중에서 가장 의미있는 작업은 어떤 것인가요?

“수졸당(1992)이 가장 큰 의미가 있죠. 아주 싸게 지은 집인데 복집이 됐죠. 설계비도 제대로 없어서, 그때 받은 게 저 현판이에요.(그는 사무실 벽에 걸려있는 현판 ‘이로재’를 가리켰다.) 뜻이 하도 좋아서 건축사무소 이름으로까지 쓰고 있죠. 그집 완공하던 날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이 나와 밀리언셀러가 되면서 거부가 되셨죠. 문화재청장도 하시고….(웃음) 지금 보면 허점투성이인 건물이지만 그 집은 ‘빈자의 미학’에 바탕해서 승효상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설계한 첫번째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승효상 건축’하면 붉은색으로 부식되는 내후성강판을 사용한 건축물을 떠올립니다. 이번 묘역에도 곡장으로 내후성강판을 사용하셨다고 했는데, 이 재료를 웰콤시티 사옥 등에 사용해 다수의 건축상을 받는 등 호평을 얻었습니다.

골목이 마당과 창고가 되는 달동네는 ‘빈자의 미학’ 전형

“건축의 물성, 재료의 물성을 발견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건축가로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사실 내후성강판뿐 아니라 노출콘크리트, 드라이비트, 현무암, 목재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붉은색 강판은 내후성강판이라고 하는 재료인데요. 처음엔 녹이 슬지만 일정 단계가 지나면 더 이상 부식이 진행되지 않아 도장비 등 건축비를 줄일 수 있는 재료예요. 외환위기로 힘들던 시절, 처음 국내에 들여와 써봤는데 요즘엔 많이들 쓰죠. 시간이 흐르면서 낡아가고 자연스러워지는 물성이 좋아요. 개인적으로 작가 리처드 세라, 알베르토 자코메티, 칼 안드레 등의 작품을 좋아하는데 자신의 의도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최대한으로 압축해 표현하는 부분을 높이 칩니다. 형태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간이 가진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제 의도를 극대화하기 위해 이에 맞는 재료를 골라 사용했습니다.”

-건축의 공공적 가치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현재 한국의 주요 도시에서 진행되는 공공디자인에 대해선 어떻게 바라보고 계십니까.

“공공디자인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말이에요. 공공영역에 관한 디자인이라고 풀이는 합디다만 뜻이 불분명하니 개념도 분명치 못하죠. 어떤 작업이든, 공간적 개념을 품고 있다면 반드시 건축가가 함께 작업해야 한다고 봐요. 건축가는 배제된 채 간판 바꾸고 벽화 그리는 것이 공공디자인은 아니죠.”

-올해로 이로재 건축사무소를 내신 지 20주년이 됐습니다. 스스로 지난 20여년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뚜렷한 건축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일관성 있는 작업을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20주년을 기념해서 작품집과 강의록을 모아 책을 냅니다. 강의록의 제목은 <터무니>에요. ‘터무니없다’고 할 때의 바로 그 터무니입니다. 참 좋은 단어예요. 터에 새겨진 무늬라는 뜻이거든요. 우리 선조들의 언어를 살피면 이유나 근거를 댈 때 땅과 관련된 단어를 사용하곤 했습니다. 건축의 모든 해답, 실마리도 땅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축설계 역시 땅에 의거해 기록을 찾고 새로운 무늬를 새기는 작업이라 할 수 있죠.”

건축과 건설이 동의어로 통하는 대한민국. 이 풍토를 바꿔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현재의 건축교육과 제도라고 그는 인터뷰를 통해 강력히 비판했다. “건축이 시대를 반추하고 시대를 바로잡도록 의미있는 일을 하는 것이 지식인으로서 건축가의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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