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Miscellaneous/People

이현 <정의를 말하지 않는 나라>

'정의를 말하지 않는 나라' 에서 '떳떳하게 정의를 말하라'라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임을 과거에도 느껴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지금과 같은 월드컵 시즌일 때 축구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해도 다수가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고 의견을 주고 받지만, 다수의 관심사가 아닌 화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꺼내고 남을 이해를 요구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지 싶다. 그러해서, 말은 해야겠는데 답답해서 못 견딜 때에는 광장에 나가 외치고, 급기야 어떤 사람은 분신을 까지한다.  '이런 사람이 꼭 하나 씩은 있지'라는 관조적인 시각보다는 정체된 사회를 이렇게 흔들어주고 환기를 시켜주는 고마운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한다.  

동시대의 현상을 분석하고 결론 내림에 있어, 역사는 나침반과 같다. 엔지니어로서 생각하건데, 어떠한 센서를 가지고 자연계 신호를 찍어보면 항상 노이즈라는게 많다. 그리고 이게 무엇에 의해서 이렇게 나온건지 데이터 SET하나가지고는 감이 안잡힌다. 그런데, 성급하게 판단할 경우나 시간에 좇길 경우, 최소한의 귀납적인 추리 에 필요한 추가 실험이나 일반 원리에 부합됨없이 성급한 일반화를 한다. 그리곤, 이후에 생각한 거랑 다르게 나왔을 때 허둥지둥 한다. 

역사에 대한 이해없이, 동시대 현상을 분석하는 것은 말한 바와 같이 데이터 SET 하나가지고 일반화하려는 노력이다. 문자가 생긴 이래로, 수많은 역사가 반복되어왔으므로 정말 엄청난 량의 데이터 SET이다. 로마인 이야기나 조선 실록 등은 나에게 그러한 것이었다. 지금과 같이 정의로운 사람,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사는 사람, 중간자인 사람, 정치적인 조정 역량이 강한 사람, 좋은 집안 배경을 가졌지만 정의감이 부족한 사람, 평시민이다가 어떤 계기에 의해 역사의 작은 획을 그은 사람, 세상을 등진 사람, 권력욕에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 여자에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 죽어도 도리를 다하는 사람, 충성심 뛰어난 사람... 등장 인물이 다양하지만 지금의 것과 닮아있다. 삼성에 다닐 때 선배형과 공감한 게, "여기 티비에 나오는 궁중 드라마처럼 정치, 권모술수 등이 정말 대단하구나."라고 서로 맞장구 치며 재밋어 했다.  아무리 R&D 강조해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성과를 위해서 달리는 곳이니 만큼 정치 즉, 사람과 사람사이를 조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역시 느꼈다. 

다시 돌아와서, 정의를 말할 때 '정의를 말하지 않는 나라'에서 어떻게 해야할지도 역사에서 찾아봐야하지 않나 싶다. 일할 때, 윗 사람에게 보고하는 방법보다 더많은 동료들과 더많은 타 부서와 내가 생각하는 것을 공유하고 설득해갔다. A 팀이 과거의 어떤 계기에 의해, 팀 역할이 커졌었고 이후에는 그 회사내 정치적인 힘을 유지하기 위해 역할 범위를 벗어나는 곳에 이르기까지 부당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역할을 해 다수의 팀과 구성원들이 엄청난 야근과 부당한 업무를 해야만 했다. 작은 매니저로부터 팀장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부당함에 대해 무력하다는 것을 느끼기에, 그때부터 일개 사원으로부터 타부서 사원, 매니저, 팀장에 이르기까지 업무 외 시간마다 우리가 공유하는 문제인식과 해결책을 역설하고 다녔다. 나는 그것을 정의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원래 제 위치에 있어야 할 자리. 그것이 정의가 아닐까 싶다. 

가끔 아이들이 나에게 혼이 나서 울면, 울지말고 당당하게 얘기해라라고 한다. 혼낸다고 겁먹지 말고, 잘못안했으면 당당하게 떳떳하게 왜 그런지 이야기를 하고, 잘못했음 잘못했다고 깔끔하게 얘기하고 다음에 안하겠다고 하면 된다고. 

이현 강사는 아래 강의에서 보듯이 당대의 '정의를 말하지 않는 나라'에 대해 역사적 사실을 통해 무엇이 문제였는지 구조적인 원인과 함께 잘 설명하였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떳떳하게 정의를 말하라'를 연설은 가슴안의 정의감을 뜨겁게 달군다.  

이현 < 정의를 말하지 않는 나라 >


노무현,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