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사법고시 합격 수기   





많은 사람들이 고등학교만 졸업하고도 어떻게 그 힘들다는 사법고시에 합격했냐고 묻곤 한다. 
젊은 사람들 가운데는 좀더 구체적으로 '공부를 어떤 식으로 했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1975년 내가 제 17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을 당시는 물론이고, 
20년이 거의 다된 지금까지도 내게 묻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칭찬도 반인 것 같고 호기심도 반인 것 같다. 
그런데 그때마다 제대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워낙 오래 전의 일이고 또한 조금은 숙스럽기도 해서였다. 
그러나 혼자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뛰고 흐뭇해진다. 
남들보다 많이 힘든 상황에서 공부를 했고 시험에 합격해서 그런지, 
내 인생을 되돌아볼 때 사법 고시에 합격했던 그 순간만큼 행복했고 
성취감을 느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수험 잡지인 [고시계] 75년 7월호에 '과정도 하나의 직업이었다'라는 
제목으로 고시 합격기를 쓴 적이 있다. 
이번에 책을 내기 위해 [고시계] 75년 7월호를 어렵게 구해 오랜 만에 내 합격기를 읽어보았다.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 참으로 절망도 깊었고 일도 많았던 고시 공부 시절...... 
어릴 때 쓴 것이라 여기저기 어색한 데도 많고 유치하게 느껴지는데도 있지만, 
그 당시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하고 싶어 손보지 않고 그대로 싣는다. 
그 동안 나의 고시 공부 시절에 대해 물어 보았던 분들께 
만족스런 대답이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 * * 

<과정도 하나의 직업이었다> 

1. 머리에 

지나간 일은 언제나 아름답게만 보인다지요? 
산꼭대기에서는 힘겹게 올라온 가파른 산길마저도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듯이 말입니다. 
또 승자의 과거는 그것이 자서전이든 타인의 작품이든 
가끔 신화적으로 수식되어 있음을 봅니다. 
사법시험의 합격, 이것이 긴 여정에서 하나의 중간 목적지에 불과하지만 
하나의 성취와 조그마한 승리로 평가될 수도 있기에, 
막상 합격기라는 것을 쓰려 하니 자칫 어떤 승리감에 도취되거나 
과거를 돌아보는 낭만적인 기분에 도취되어 힘겹고 괴로웠던 긴 수험 과정의 체험을 
스스로 미화시켜 얘기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까 여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졸 합격자라는 다소 특이한 제 입장이 독학도들에게 
어떤 관심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 
둔한 솜씨나마 될 수 있는 한 사실대로 기억을 더듬고 
그때의 생생한 감정들을 살려서 몇 자 쓰고자 합니다. 


2. 동기-꿈을 키우던 시절 

나는 경남 진영라는 읍에서 약 10리나 떨어진 산골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위로는 형님이 두 분으로, 큰형님은 부산 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고등고시를 준비하였으나, 
본래 가난한 살림에 벅찬 대학 공부 때문에 가세는 더욱 기울어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쯤 
끝내 응시도 해보지 못한 채 그마두고 말았다. 

당시 나는 형님을 따라 마을 뒤에 있는 봉화사라는 절에 가서 그곳에서 고시 공부를 하는 
형님 친구들의 법 이론이나 시국에 대한 토론을 자주 듣곤 했으며, 
또 형님은 자신의 좌절에서 오는 울적한 심정을 털어놓기를 좋아했던 모양으로 
가끔 상기된 어조로 나에게 여러 가지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물론 나는 그때의 얘기들이 너무 어려워서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이 많았으나, 
그들의 엄숙한 표정과 격한 어조의 토론은 만만한 젊음의 패기와 이상을, 
그리고 격렬한 논쟁의 뒤에 주고받는 소탈한 웃음은 사나이들의 인간미와 호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느꼈고, 이것들이 고시 학도들의 속성이요 
또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권으로까지 생각했다. 
결국 이런 분위기는 나에게 고시를 해보겠다는 막연한 꿈을 갖게 해주었다. 

그러나 살림은 더욱 기울어 작은 형님은 학업을 중단했다. 
부모님의 노동 능력은 차츰 줄어갔고, 마침내 최후의 명줄로 남아 있던 
조그만 과수원마져 빚에 쪼들려 처분해야 했다. 
나는 3학년이 되면서 일찌감치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5급 공무원 시험을 거쳐 독학으로 고등고시에까지 밀고 나가 보겠다는 결심으로 
옛날 형님께서 보시던 누렇게 바랜 [법제 대의]와 [헌법의 기초 이론(유진오)]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해 10월에는 일자리를 찾아 나갔던 형님께서 돌아와 내가 하는 꼴을 보고 
크게 나무라시며 진학을 권하셨다. 
나도 가정 사정을 들어 고집을 부려 보긴 했으나 끝내 강권에 못 이겨 
부산 상고에 장학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예순이 넘으신 부모님들의 생활은 아무런 토지의 근거도 없이 
자신들의 노동으로 해결하시도록 내버려 둔 채 작은 형님이 어렵고 
힘든 직장을 전전하며 벌은 돈으로 내 숙식비를 부담해야 했으니, 
대학 진학은 아예 엄두도 내어 보지도 못하고 취직 반에 들어갔다. 

그래도 역시 막연하게나마 길러 오던 고시에의 꿈을 버릴 수는 없었던지 
3학년 말 농협에 취직시험을 치른 후 발표도 나기 전에 65년도 11월호 [고시계]를 한 권 샀다. 
고시의 냄새를 알기 위하여...... 


3. 출범, 그리고 표류 


농협에의 낙방에 이어 개인 회사에 취직했으나 생각보다 급료가 박했고 근무 시간이 많았던 것 
은 고시로 향한 출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야산 돌밭을 개간하여 심은 고구마와 영세민 취 
로 사업장에서 내주는 밀가루로 연명하시는 부모님들의 실망을 모른 체하고 직장을 그만두었다. 

한 달 반의 급료 6천원으로 몇 권의 책을 사고 마을 건너편 산기슭에 토담집을 손수 지어 '마옥 
당(磨玉堂)'이라 이름 붙인 후, '사법 및 행정 요원 예비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당시에는 
학력 제한이 있었다). 책값을 벌겠다고 울산 한국비료 공장 건설 공사장에 막노동을 하러 갔다 
가 이빨이 3개나 부러지고 턱이 찢어지는 불운을 겪으면서도, 용케 11월에는 제7회 예시에 합격 
하였다. 

4개월 정도의 준비로 예시에 합격하는 행운과 함께 이제까지의 나의 처절한 투쟁은 막을 내렸 
다. 나의 예시 합격에 자극받아 큰형님은 67년에, 작은 형님은 68년에 각각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67년에는 법률 서적을 살 형편이 못되어 예비 시험 과목을 새로 공부하고 있다가 68년 
에는 군에 입대했다. 군에 있는 동안에도 공부를 해 보려고 애썼으나 영어 단어 하나 암기를 못 
하고 3년을 표류하고 말았다. 


4. 열풍에 돛을 달고 - 그리고 좌초 


71년 제대를 하고 집에 오니 집안 사정은 상당히 호전되어 있었다. 4월부터 옛날의 '마옥당'을 
수리하여 공부를 시작, 5월 2일에 3급 1차에 합격, 그리고 사법시험으로 전환, 처음 법률 책을 
대하니 다소 흥분되기도 했으나 과연 이 어려운 것을 해낼 수 있을지 더럭 겁부터 났다. 

그러나 소설을 읽듯이 마구 읽었다. 생각보다 쉬웠다. 겉만 슬슬 핥으니 그럴 수밖에……. 전 과 
목을 무질서하게 읽었다. 행정법과 상법이 좀 어려운 듯했다. 민법을 모르니 그럴 수 밖에……. 
소송법은 전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실체법을 전혀 모르니 그럴 수밖에……. 4개월에 걸 
쳐 오리무중을 헤매면서 전 과목 3회독을 마쳤다. 

「고시계」를 66년도부터 소급해서 샀다, 그러나 합격기 말고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 동 
안의 체험과 「고시계」합격기에서 읽은 것을 정리하여 얻은 것은 책을 읽는 순서 정도였다. 이 
리하여 민법을 먼저 읽고 상법과 행정법에 들어가고 실체법을 먼저 읽고 소송법에 들어간다는 순 
서를 정하여 9월부터 시작했다. 새로 읽으니 과거의 3회독은 간 곳 없고 전혀 새로 읽는 기분이 
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다시 어려워졌다. 

그러던 중 10월에 14회 공고가 났다. 외면하려 했으나 자꾸만 들떴고 마침내는 고시 사상 최단 
기 기록을 목표로 하여 무작정 덤볐다. 문제집을 샀다. 

1차의 합격은 나의 이러한 만용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젠 문제집마저도 내 나름대로 밑줄을 긋 
고 그 부분만 골라 읽었다. 8개월 정도의 준비로 2차 시험에 응했다. 

시험장에서 고향의 중학교 후배를 만났다. 사법시험 준비는 나보다 훨씬 선배였다. 나의 공부 기 
간을 듣고는 "전 과목을 한 번 다 보지도 못했겠네요?" 했다. 어리석게도 나는 자신이 무시당하 
는 기분에 저으기 분개하면서 우습게 맏아 넘겼다. "두고 보라지……." 정말 하룻강아지 범 무서 
운 줄을 모르는 막강한 뱃심이었다. 이런 뱃심으로 시험에 응했다. 기막히게 더 잘 썼다. 내가 
아는 건 다 썼고 또 아는 건 그 뿐이었으며 집에 와서 책을 대조해 보지도 않았으니, 기막히게 
잘 썼다고 생각할 수밖에……. 점수는 50점 얼마였다. 

뒤에 읽어보니 문제집에 밑줄을 그어 두었던 부분이 모두 엉터리였다. 다른 색깔로 새로 밑줄을 
고쳐야 할 형편이었다. 이러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응시자를 젖히고(?) 과락 없이 300명 
선 안에 들어갔으니 다음에는 틀림없을 거라고 또 한 번 낙관했다. 

그러나 발표 후 5~6개월을 이유 없이 허송했다. 제대 후 공부도 시작하기 전부터 마을 처녀에 
게 마음을 뺏기기 시작하여 상대방의 단호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열을 올리게 되고 8개월에 걸쳐 
집요하게 추근거려 1차 시험 직전에야 겨우 처녀의 마음을 함락시키고는 안도했는데, 이제 그녀 
가 결혼 적령을 넘었다는 사실과 고시와 연애는 양립할 수 없다는 중론 사이에서 그녀와 나는 고 
민의 연쇄반응을 일으켰고, 또 이틀이 멀다 하고 만나지 않고는 배길 수 엇는 애정의 열도에 비 
례하여 공부를 위한 시간에의 집착이 강하여 심리적 갈등이 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9월에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장유암이라는 절에 들어갔다. 국사의 추가로 부담이 늘었 
지만 시험이 연기된 것을 다행으로 여겨 '수석 합격'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열심히 공부를 했다. 

73년 1월에는 예년의 시험 대신에 그녀와 결혼했고 5월에는 아들도 낳았으나 나는 여전히 절에 
서 계속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 그런데…… 글쎄 정말 이럴 수가! 그렇게 끔찍이도 나를 아껴주시며 자신의 못 다한 소망을 
나에게 걸어 꿈을 키워 주시던 큰형님이 5월 14일 교통사고로 저 세상으로 떠나 버리셨다. 

한 줌 잿가루로 화해 버린 형님의 유해를 고향에 묻고 절로 올라 올 때는 길도 제대로 보이지 않 
았고 이제부터 전혀 공부도 되지 않았다. 단지 타성에 의하여 책장을 넘기고 있는 동안에도 마음 
은 삶과 죽음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생각들과 고시와 출세에 대한 회의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 
다. 

그래도 결론은 하나, 형님의 꿈 그리고 나의 꿈, 어떻든 고시는 필연적이었다. 15회 시험까지 남 
은 기간은 40여일 뿐,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하고 마침내 책을 읽기만 하면 가슴이 울렁거리며 답 
답해지는 알지 못할 병에 걸리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시험을 한 달 앞두고 보따리를 싸 들고 
집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아직 산고가 풀리지 않아 부자유스러운 아내와 핏덩이 신걸이, 자식을 잃은 부모님의 비 
탄……. 공부가 될 리 없으니 병은 점점 더해지고……. 수석 합격이라는 화려한 표어와는 달리 
응시조차 포기하고 싶은 것을 부모님의 시선이 두려워 마지 못해 상경하였으나, 시험 첫 날부터 
가슴이 답답하고 목구멍에 무엇이 치밀어 올라 우유와 계란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그래 
도 기를 쓰고 책을 볼라치면 몸에서 식은 땀이 배어 나왔다. 

「고시계」의 통계란에 따르면 결과는 90위 정도, 정리만 잘하면…… 하는 자신을 얻은 셈이었 
다. 


5. 새로운 좌표 - 직업 의식 


그러나 좀 쉬어야 했다. 책을 잡기만 하면 예의 증세가 나를 괴롭혔다. 고시를 그만둘까도 싶었 
다. 

학교 성적이 우수했다는 사실이 반드시 고시를 해야 할 필연적 이유로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도 되었고, 법을 공부하면서 차츰 정의의 이념을 배워 가는 동안 '고시=권력=출세'라는 과 
거에 내가 생각했던 등식이 우스운 것임을 느끼게 될 무렵 형님의 뜻 아닌 타계는 예시 과목의 
철학 개론을 공부하면서부터 어렴풋하게나마 생각해 오던 삶의 의미를 보다 깊이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맹목적 출세주의와 '그 수단으로서의 고시'라는 과거의 생각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상고를 졸업한지 너무 오래되어 새로운 진로를 찾기는 어렵고 하여 고시를 그만두지는 못 
했다. 

다만 이제는 고시 아니면 파멸이라는 배수의 진은 거두어 버리고, 하나의 직업인이 자기의 생각 
에 충실히 종사하듯이 고시 공부도 평범한 생활의 일부로 생각하려 했다. '수석 합격'이라는 표 
어 대신에 '천직=소명'이라 써 붙이고, 숙소를 마옥당에서 집으로 철수하여 직장에 출퇴근하는 
기분으로 낮에는 마옥당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집에 와서 여유가 있을 때만 공부하기로 하였다. 

아기가 울면 달래기도 하고 기저귀도 갈아 채우고 밤이 늦도록 아내와 정담을 나누며 잠을 덜 자 
면 이튿날 낮잠을 잤다. 그러나 가슴과 목의 증세는 쉽게 낫질 않아 16회 시험까지는 부담 없이 
쉬었다. 

16회 시험도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 응시한 정도였고 성적은 15회보다 내려 130위 안팎으로 생각 
되었다. 

17회 준비 1년간은 정말 순조로웠다. 절에 있을 때 만들었던 독서대의 실용 신안 특허 출원 관계 
로 9-10월에 조금 쉰 것 말고는 가금 아내와의 대판으로 선풍기 목이 부러지거나 문짝이 떨어져 
나가는 활극이 연출되기도 하는 가운데에도 예전과 같이 재미있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10월 하순 
부터는 풀었던 긴장을 바짝 조여 이때부터는 아내가 들 건너 마옥당까지 점심을 날라다 주었고 
잠은 여전히 집에서 잤으나 신걸이가 잠들기 전에는 우리 방에 못 오게 하고 책을 보았다. 

그러나 17회 때에도 역시 정리가 다 되지는 않았다, 단지 다른 어느 때보다 정리 기간이 착실했 
으니 훨씬 낫겠지……. 집을 나서면서 아내에게 "신문 기자들이 수석 합격자 인터뷰하러 올 테 
니 당신도 피력할 소감 한 마디 준비해 두지 그래."하고 허풍을 쳤다. 

건강은 좋았고 시험은 순조로웠다. 집에 와서도 역시 출발 전의 호언장담을 되풀이했다. 3월 27 
일 아침 먹고는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없어 진작부터 낮잠에 들어갔다. 꿈결에 "무현아! 무현 
아!"하는 친구의 떨리는 목소리, 그도 뒷말을 잇지 못했고 더 들을 필요도 없이 아내는 내 무릎 
에 엎드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형님! 지하에서도 신문을 보십니까? 아버지 어머니도 형님 생각에 자꾸만 우십니다." 


6. 더하고 싶은 이야기 


공부 방법, 책의 선택, 공부 장소, 독서 방법 등에 관한 문제는 각각 제 것이겠지요. 그래도 일 
반론이 있다면 이미 많은 선배님들의 합격기가 말한 것과 나도 같습니다. 

그래서 제 특이한 입장에 관한 것과 또 제가 따로 하고 싶은 얘기만 골라서 제 경험을 예로 들 
어 쓰렵니다. 다만 개인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얘기하는 것은 객관성을 잃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됩니다마는, 어느 정도 참고는 되리라 믿습니다. 

1) 독학에 대하여 

응시자 중에 4년제는 물론 초급대학에도 안 간 사람들만을 독학도로 계산해도 그 수는 600명을 
넘는데, 이 수는 서울대 출신 응시자 800명에 거의 육박하는 수임에도 합격자 수는 수년만에 하 
나씩 나올 뿐으로 도저히 비교가 안된다. 이런 점을 보면 대학교에는 꼭 가는 것이 좋을 것 같 
다. 

주로 경제 사정과 연령이 문제인 것 같으나, 경제 문제라면 요즘 일부 사립 대학에서 고시반을 
편성하여 학비는 물론 숙식 일체까지 밀어 준다고 하니 오히려 독학보다 경제적으로 부담이 가벼 
울 것이다. 연령 문제도 생각 나름이 아닐까? 

2) 그래도 구태여 독학을 하겠다면 독학도들의 고시 합격률이 지극히 저조한데 반하여 대학 출신 
자 중에는 법대 출신이 아니고도 고시에 합격하는 사람이 많고 17회에는 수석 합격자가 공대 출 
신이다. 이러한 결과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연유하는 것이겠으나 나는 이 점을 대학에서 얻게 되 
는 일반 교양 과정의 지식 탓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과거 예비 고시에 합격한 후에도 법서를 살 형편이 못되어 군에 입대하기까지 1년간을 예 
시 과목의 책을 그대로 읽었고 이것이 제대 후 법서를 공부할 때 상당한 도움을 준 것 같았다. 
이런 점에서 학력 제한이 철폐된 오늘의 제도보다 과거의 예비 시험 제도가 보다 합리적인 제도 
가 아닐까? 

흔히 독학도들은 소위 공부 방법이나 수험 정보, 고시 기술론, 고시 분위기 등에 생소함을 걱정 
하게 되나 그런 점은 고시 잡지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수험 기간 중 많은 사람들과 많은 
얘기들을 나누어 보았으나, 수험 잡지의 합격기나 좌담회, 통계 기타 안내편에 나오는 이상의 아 
무 것도 얻을 수 없었다. 

3) 병역 문제 

군에서 공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러나 어차피 가야 한다면 일찍 갔다 오는 것이 좋을 것이 
다. 나는 현역 복무 중 가는 세월을 한없이 초조하게 생각했으나, 마치고 나니 부담이 없어 좋았 
고 또 졸병 생활 자체가 하나의 수업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수험 과정 중에 필요했던 끈기 있 
는 자세는 군에서 몸에 익힌 바 큰 것이었다. 

4) 연애와 결혼 

처음 8개월에 걸친 일방적 구애 작전은 시간과 정력의 손실이 너무 컸다. 그러나 일단 결혼한 후 
에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아내의 세심한 배려는 말할 것도 없고 점심을 가지고 올 때면 언제 
나 따라오는 개구장이 신걸이의 재롱은 식사시간을 즐겁게 해 주었다. 붉은 낙조를 바라보며 집 
에 건너오면 또 반겨 주는 신걸이의 고사리 손이 하루의 긴장과 피로를 깨끗이 잊게 해 주어, 나 
는 침체기를 몰랐고 따로 휴식이나 기분 전환 거리가 필요 없었다. 

애타는 애인들 있으면 결혼들 합시다. 

5) 건강 

절대적 조건임은 두말 할 것 없고 다만 공부로 오는 정신적 육체적 피로보다 초조, 불안 등의 심 
리적 파탄에서 오는 손실이 훨씬 더 심각하고 장기적인 것이다. '고시 아니면 파멸'이라는 생각 
이나 출세에의 지나친 집착, '최단기' '수석합격' 등의 욕심은 사람을 견딜 수 없이 초조하게 만 
들었다. 

오히려 하나의 직업인이 성실하게 직장에 임하듯 수험 생활에 임했더니 장기에 걸쳐 장소를 옮기 
지도 않고 공백 기간도 없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바꾸고도 곧잘 대성하 
더라. 일정시까지 안되면 직업을 바꾸면 그만이다. 여하튼 다소간의 긴장은 필요하겠으나 지나 
친 긴장 불안 초조는 금물이다. 

또 며칠을 허송했다 하여 갑자기 초조해지고 그를 보상하겠다고 급하게 열을 올리고 무리를 하 
는 것은 잇달아서 또다시 며칠의 침체와 시간의 낭비를 강요하는 결과가 되기 십상이다. 지나간 
시간은 아무리 아까워도 깨끗이 잊는 것이 좋다. 장기전에서의 며칠의 허송은 그리 문제되지 않 
는다. 나는 최종 정리 기간에도 부부 관계는 억지로 금욕하지는 않았다. 

여하튼 나는 이런 느슨한 자세로 공부했다. 그러나 결코 남보다 노력을 덜하지는 않았다. 보통 
10시간은 넘게 공부했고 일단 책상에 앉으면 무서운 집중력을 구사했다. 머리가 혼란해지고 잡념 
이 생길 때에는 책을 보면 머리가 맑아지고 안정이 되었다. 그러나 일단 책을 떠나면 고시는 깨 
끗이 잊었다. 이런 느슨하면서도 투철한 자세는 확고한 직업관에서 왔다고 생각되지만, 또 합격 
에의 신념으로 보완될 때 더욱 안정적이라 생각된다. ..
'정의를 말하지 않는 나라' 에서 '떳떳하게 정의를 말하라'라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임을 과거에도 느껴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지금과 같은 월드컵 시즌일 때 축구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해도 다수가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고 의견을 주고 받지만, 다수의 관심사가 아닌 화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꺼내고 남을 이해를 요구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지 싶다. 그러해서, 말은 해야겠는데 답답해서 못 견딜 때에는 광장에 나가 외치고, 급기야 어떤 사람은 분신을 까지한다.  '이런 사람이 꼭 하나 씩은 있지'라는 관조적인 시각보다는 정체된 사회를 이렇게 흔들어주고 환기를 시켜주는 고마운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한다.  

동시대의 현상을 분석하고 결론 내림에 있어, 역사는 나침반과 같다. 엔지니어로서 생각하건데, 어떠한 센서를 가지고 자연계 신호를 찍어보면 항상 노이즈라는게 많다. 그리고 이게 무엇에 의해서 이렇게 나온건지 데이터 SET하나가지고는 감이 안잡힌다. 그런데, 성급하게 판단할 경우나 시간에 좇길 경우, 최소한의 귀납적인 추리 에 필요한 추가 실험이나 일반 원리에 부합됨없이 성급한 일반화를 한다. 그리곤, 이후에 생각한 거랑 다르게 나왔을 때 허둥지둥 한다. 

역사에 대한 이해없이, 동시대 현상을 분석하는 것은 말한 바와 같이 데이터 SET 하나가지고 일반화하려는 노력이다. 문자가 생긴 이래로, 수많은 역사가 반복되어왔으므로 정말 엄청난 량의 데이터 SET이다. 로마인 이야기나 조선 실록 등은 나에게 그러한 것이었다. 지금과 같이 정의로운 사람,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사는 사람, 중간자인 사람, 정치적인 조정 역량이 강한 사람, 좋은 집안 배경을 가졌지만 정의감이 부족한 사람, 평시민이다가 어떤 계기에 의해 역사의 작은 획을 그은 사람, 세상을 등진 사람, 권력욕에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 여자에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 죽어도 도리를 다하는 사람, 충성심 뛰어난 사람... 등장 인물이 다양하지만 지금의 것과 닮아있다. 삼성에 다닐 때 선배형과 공감한 게, "여기 티비에 나오는 궁중 드라마처럼 정치, 권모술수 등이 정말 대단하구나."라고 서로 맞장구 치며 재밋어 했다.  아무리 R&D 강조해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성과를 위해서 달리는 곳이니 만큼 정치 즉, 사람과 사람사이를 조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역시 느꼈다. 

다시 돌아와서, 정의를 말할 때 '정의를 말하지 않는 나라'에서 어떻게 해야할지도 역사에서 찾아봐야하지 않나 싶다. 일할 때, 윗 사람에게 보고하는 방법보다 더많은 동료들과 더많은 타 부서와 내가 생각하는 것을 공유하고 설득해갔다. A 팀이 과거의 어떤 계기에 의해, 팀 역할이 커졌었고 이후에는 그 회사내 정치적인 힘을 유지하기 위해 역할 범위를 벗어나는 곳에 이르기까지 부당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역할을 해 다수의 팀과 구성원들이 엄청난 야근과 부당한 업무를 해야만 했다. 작은 매니저로부터 팀장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부당함에 대해 무력하다는 것을 느끼기에, 그때부터 일개 사원으로부터 타부서 사원, 매니저, 팀장에 이르기까지 업무 외 시간마다 우리가 공유하는 문제인식과 해결책을 역설하고 다녔다. 나는 그것을 정의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원래 제 위치에 있어야 할 자리. 그것이 정의가 아닐까 싶다. 

가끔 아이들이 나에게 혼이 나서 울면, 울지말고 당당하게 얘기해라라고 한다. 혼낸다고 겁먹지 말고, 잘못안했으면 당당하게 떳떳하게 왜 그런지 이야기를 하고, 잘못했음 잘못했다고 깔끔하게 얘기하고 다음에 안하겠다고 하면 된다고. 

이현 강사는 아래 강의에서 보듯이 당대의 '정의를 말하지 않는 나라'에 대해 역사적 사실을 통해 무엇이 문제였는지 구조적인 원인과 함께 잘 설명하였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떳떳하게 정의를 말하라'를 연설은 가슴안의 정의감을 뜨겁게 달군다.  

이현 < 정의를 말하지 않는 나라 >


노무현,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하라"










2009년 5월 23일, 해가 떠오르는 시각. 그는 똑바로 앞을 보면서 뛰어내렸다. 그의 몸은 두 번 바위에 부딪치면서 부엉이바위 아래 솔숲에 떨어졌다. 마지막 길을 동행했던 경호관이 다시 찾아내기까지 30분 동안, 그는 거기 혼자 있었다.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말을 하지 못했다. 숨을 쉬지 못했다. 

그가 이승의 마지막 잠을 혼자서 청했던 그 시각, 나는 제주도에서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혼자서 마지막 글을 수정해 컴퓨터에 다시 저장하고 봉화산 돌계단을 걸어 올라갔던 그 시각, 나는 편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텔레비전 속보를 보고 누군가 전화를 하기 전까지, 나는 그가 떠났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김해로 가는 항공 편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커다란 선글라스로 눈을 가린 채 제주공항 대합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물이 났을 뿐.


사람들이 많이 울었다. 봉하마을 분향소에서도 서울역 분향소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울었다. 나도 울었다. 울면서 생각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이 올까? 왜 저렇게들 우는 것일까? 국민장을 치른 엿새 동안 봉하마을에만 100만 명 넘는 조문객이 왔다. 전국 분향소에서 500만 명 넘는 국민이 조문했다. 대한문 시민분향소 주변은 현실공간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좁은 곳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표정을 지은 채 하염없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구령에 맞춰 똑같이 두 번 절을 올리고, 그리고 저마다 눈물을 훔치며 빠져 나가는 광경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노제를 치른 서울시청 광장은 탄식과 슬픔이 너울대는 사람의 바다였다. 

그의 몸은 물과 흙, 나무와 바람, 태양과 별들에게 돌아갔다. 남은 재 한 줌이 부엉이바위가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곳, 작은 비석 아래 묻혔다. 그의 고통과 번민은 분향소에서 눈물을 쏟았던 사람들의 가슴으로 흩어졌다. 아주 작은 조각 하나가 내 마음에도 들어왔다. 살아있는 그를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 신호가 움직이는 사이버 공간에 가면, 변함없이 활기찬 그가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건다. 

서울역 분향소에 서서 눈을 감고 그를 생각했다. 처음 보았던 때부터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던 날까지, 그와 함께 했던 순간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나에게 어떤 존재였던가? 그는 세상에 무엇을 남겼는가? 그는 왜 그렇게 떠난 것일까? 나는 무엇 때문에 이리도 아픈 것일까?

그는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었다. 물려받은 재산이 없었다. 화려한 학력도 없었다. 힘있는 친구도 없었다.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연민, 반칙을 자행하는 자에 대한 분노,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열정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연민과 분노와 열정의 힘만으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처음에 혼자였던 그는 마지막에도 혼자였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동안에도, 높은 곳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도,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놓아 두지 않았다. 끝없이 연민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는 높은 곳에서 희열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낮은 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만 기쁨을 느끼는 듯 보였다. 그럴 때조차도, 함께 고통받지 않으면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나는 좋았다. 그가 혼자, 너무 외로워 보였기에 그에게 다가섰다. 하지만 그 외로움을 덜어주지 못했다. 그가 회복할 수 없는 실패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받고 있었던 시간, 나는
곁에 없었다. 그가 절대고독 속에서, 돌계단을 하나씩 밟으며 혼자 부엉이 바위에 오르게 버려두었다. 그를 외롭게 않게 하려고 내가 했던 모든 일들이, 오히려 그를 더 혹심한 고독에 몰아넣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혼자 떠났다는 것을 안 순간, 나를 사로잡은 감정은 짓누르는 죄책감이었다. 그런 감정없이는 지금도 그를 떠올릴 수 없다. 

내가 아는 그는 연민과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30대 중반을 넘긴 평범한 변호사 노무현을 양심수와 노동자를 돕는 인권운동으로 인도한 것은 그 어떤 빛나는 이념도 아니었다. 정의가 생존권을 지키려고 싸우다 박해 받는 동시대인에 대한 소박한 연민이었다. 불의가 횡행하는 세상에서 혼자 안온한 삶을 누리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부끄러움이었다. 자신의 안위를 지키려고 시대를 외면하려 했을 때 가슴 밑바닥을 때린 수치심이었다. 그런 것들 때문에 그는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고 정치를 시작했다. 나에게 그는, 그가 하는 일에 힘을 보태지 않고는 부끄러움을 면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만인의 인정을 받을 만큼 충분히 유능하고 지혜로운 대통령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인권 변호사로서, 민주화운동가로서,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대통령으로서 많은 일을 해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시민으로서, 정치를 통해 다 하지 못했던 일들을 마저 하려고 했다. 그랬던 그가 왜 그렇게 훌쩍 떠나야 했던 것일까? 이 질문을 떠올릴 때마다 주체하기 어려운 분노에 휩쓸리곤 했다. 절망감에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검찰이 그를 정조준한 수사와 비열한 여론 재판을 시작했을 때, 그는 전직 대통령의 명예를 포기했지만 사실만은 지키려고 애썼다. 그것은 노무현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없이 가장 높은 곳으로 오르는 동안, 그는 너무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도움을 받았다. 그는 그 사람들을 생각했다. 대통령으로서 알고 범죄를 저지른 것과, 주변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사고가 난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그는 ‘사실’을 지킴으로서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명예를 반이라도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헛된 희망이었다. 누구도 ‘사실’과 ‘피의자의 권리’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과 정치검사들과 언론은 그를 부패하고 파렴치한 인물로 만들었다. 민주주의, 인권, 정의, 국민 통합을 원해서 그를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에게도 침을 뱉었다. 이것이 죽음보다 고통스러웠기에 그는 외쳤다. “노무현을 버리셔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를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설령 사람들이 모두 그를 버린다 해도 상황이 달라질 수는 없었다. 자신이 사라지는 것 말고는 모두를 이 수렁에서 건져낼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떠나 버린 것이다. 그가 떠난 현실을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남아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익명으로 언론에 등장했던 청와대 ‘핵심 관계자’들, 대검 중수부 검사들에게서 나는 ‘사악한 의도’를 보았다. 적개심과 분노가 일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보수와 진보를 가릴 것 없이, 언론에 대해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절망감을 느꼈다. 그는 언론의 부당한 특권, 언론의 ‘조폭적’ 권력 행사, 언론인들의 오만에 공개적으로 항의하고 도전했던, 단 하나뿐인 정치인이었다. 그가 비참하게 눌려 죽어 버린 이 나라에서, 앞앞으로 또 그런 도전을 감행하는 정치인이 나올 수 있을까?

어느 언론사가 편을 들어주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사실’에 대해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보여주기를 원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소박한 희망조차 눈길을 주는 언론이 없었다. ‘사실’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지 않는 언론은 사람을 해치는 흉기가 된다. 그가 부엉이바위에 오르기까지 모든 일들을 직접 간접 함께 체험한 끝에 내 마음에 남은 감정은 분노와 절망감이었다. 세상이 무서웠다. 사람이 싫어졌다. 민주주의 자유 정의 진보 조국, 이런 말을 들어도 더는 가슴이 설레지 않았다. 


곳곳에서 너그럽고 후한 추도사가 나왔다. 하이에나가 우글대는 황량한 들판에서 그가 홀로 쫓기고 있을 때 동정의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모든 것이 그가 자초한 일이라며 돌을 던졌던 사람들도 슬픈 표정을 지으며 그를 추도했다.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했음을 인정받았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를 부엉이바위로 오르게 한 주역들은 한 오라기의 후회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의 죽음 앞에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그들은 그가 살아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떠난 후에도 여전히 그를 향해 침을 뱉고 돌을 던진다. 

서울역 분향소에서 내 귀에 대고 낮고 강한 목소리로 속삭인 시민들이 있었다. “복수합시다!” “복수해 주세요!” “꼭, 복수할 겁니다!” 그들에게 정말 복수해야 하는 것일까? 마음을 먹는다면 복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는 것이 진짜 복수가 될까? 그가 떠난 자리에 남겨진 이 질문에 나는 아직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복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또는 하고 싶어도 복수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그들과 화해해야 하는가? 그가 정치생명을 걸고 추구했던 ‘국민 통합’이 그런 사람들까지도 껴안는 것일까? 화해하기로 마음먹으면 화해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화해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도 아직 대답할 수 없다. 얼마나 더 시간이 흘러야 대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가 남긴 말과 글을 정리하면서 끊임없이 자문해 보았다. 그는 세상에 무엇을 남겼는가? 나는 그와 어떻게 작별해야 하는가? 그는 ‘사람사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 꿈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그 꿈이 결국 그를 부엉이바위에 오르게 했다. 5년 동안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꿈 많은 청년’이었다. 

2009년 5월 23일 아침 우리가 본 것은 ‘전직 대통령의 서거’가 아니라 ‘꿈많았던 청년의 죽음’이었는지도 모른다. 1987년 6월항쟁은 우리 민주주의의 청춘이었다. 양김 분열과 3당합당, 정치인들의 기회주의와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거치며 모두가 중년으로 노년으로 늙어가는 동안, 그는 홀로 그 뜨거웠던 6월의 기억과 사람사는 세상의 꿈을 가슴에 품고 씩씩하게 살았다. 잃어버린 청춘의 꿈과 기억을 시민들의 마음속에 되살려 냈기에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던 시절에도 대통령을 마친 후에도 그는, 꿈을 안고 사는 청년이었다. 

연민의 실타래와 분노의 불덩이를 지니고 살았던 그는, 반칙하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했다. 대한민국을 그런 믿음 위에 올려놓으려고 했다. 그 믿음이 국민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한, 노무현이 대통령일지라도 그 시대는 ‘노무현 시대’일 수 없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다 이루지 못했던 꿈을 마저 이루기 위해 전직 대통령으로서 시민으로서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다. 그런데 자신의 존재가 그 꿈을 모욕하고 짓밟는 수단이 되고 말았다.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에 그는 생명을 버렸다. 그가 생명을 던진 그 자리에, 이제 ‘사람사는 세상’의 꿈만 혼자 남았다. 

‘사람사는 세상’의 꿈이 그렇게 살아 있는 한, 그를 영영 떠나보내지는 못할 것 같다.
노前대통령 묘역 공간디자인 한 건축가 승효상
글 윤민용·사진 남호진기자 vista@kyunghyang.com
ㆍ“묘지가 일상 가까이에 없어서 도시가 경건하지 못한겁니다”
건축은 땅에 의거해 기록찾고 새로운 무늬를 새기는 작업  

승효상 건축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내후성강판과 노출콘크리트로 지은 사옥 이로재 앞에 승효상이 섰다. 이로재는 이슬을 밟는 집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건축가 승효상(57). 이제 그의 이름은 건축론 ‘빈자(貧者)의 미학’과 더불어 하나의 브랜드가 됐다. 서울대 건축과를 졸업한 뒤 1975년 한국 건축의 거장 김수근 문하에서 건축 실무를 익혔고 15년간 공간건축에서 국립청주박물관과 마산 양덕성당, 서울 경동교회 등의 수석디자이너를 맡았다. 1989년 독립 후 건축사무소 이로재를 열어 지난 20년간 수졸당, 수백당 등의 주택과 웰콤시티 사옥, 쇳대박물관, 대전대 혜화문화관, 부산 구덕교회 등을 설계했고 파주출판도시 코디네이터로 참여했다. 이런 공로로, 2002년 건축가로는 처음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하는 ‘올해의 작가’에 뽑혔고, 2008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 한국관 커미셔너를 맡았다. 2000년대 들어서는 중국에 진출해 베이징 첸먼지역 30만㎡를 재개발하는 설계프로젝트를 따냈고, 만리장성 팔달령 인근에 들어선 부티크 호텔 ‘코뮨 바이 더 그레이트 월’에 아시아를 대표하는 12명의 건축가 중 한 명으로 초청받아 클럽하우스를 설계하기도 했다.

그가 최근 독특한 공간을 디자인했다.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이다. 유홍준 명지대 교수의 추천으로 시인 황지우, 미술작가 안규철·임옥상, 안병욱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건축가 정기용 등과 함께 ‘아주 작은 비석 건립위원회’에 참여해 전체 공간디자인을 맡았다. 산 자가 아닌 죽은 자를 추모하기 위한 공간, 더구나 추모의 대상은 전직 대통령이다. 그간 ‘빈자의 미학’을 설파하며 물신주의에 사로잡힌 한국 건축계를 질타해온 그가 설계한 묘소가 궁금했다. 작금의 한국 건축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오고갔음은 물론이다.

추모글 다 닳아 없어지고 기억만 남는 설계가 마땅

-어떤 연유로 ‘아주 작은 비석 건립위원회’에 참여하게 됐습니까.

“유홍준 교수가 저를 추천했습니다. 사저를 비롯해서 봉하마을 전체의 마스터플랜을 정기용 선배께서 맡으셨는데, 차마 묘소는 직접 당신이 못하겠다 하시더라고요. 워낙 충격을 받으셔서, 제가 맡게 됐죠.” 

승효상이 디자인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의 공간 스케치. 두 개의 물줄기가 삼각형 모양의 대지를 세부분으로 나눠 추모의 마음을 되새기기에는 더없이 좋은 공간이 됐다.

-묘역을 단계적으로 조성한다고 들었습니다.

“전체 그림은 다 그려졌지만 (장례를 치르느라) 시간이 급해서 1단계로 지석만 얹은 상태입니다. 나머지는 추후에 진행하자고 이야기가 된 상태고요. 그래서 지금은 초라하게 느껴질 겁니다. 처음엔 부지 선정을 놓고 많은 논의가 있었는데 사저 뒤편은 개인의 묘로는 적당하지만 전직 대통령의 묘로는 적당하지 않다고 봤습니다. 대개 우리나라의 산소는 산중에 있는데, 산 위가 아니라 낮은 평지에 광장처럼 있는 게 노무현 전 대통령다울 것 같아 지금의 터로 정하게 됐지요. 또 마을 끝부분이면서 사저와 부엉이바위 등 봉하마을 전체를 조망하기에도 좋은 지점입니다. 묘역의 콘셉트는 ‘자발적 이방인을 위한 묘역’입니다. 부지가 1000평인데 의식을 행하기에는 좋은 자리예요. 이곳을 지나는 물줄기는 2개가 있는데 물줄기가 자연스럽게 묘역을 3부분으로 나눕니다. 들어가는 공간, 기다리는 공간, 참배하는 공간으로요.”

-구체적으로 설명 부탁드립니다.

“묘역의 기본 개념은 종묘에서 빌려왔어요. 종묘는 1m 높이로 월대를 쌓고 박석을 깔아놓았어요. 월대는 혼령들이 만나는 지점이자 한없는 비움의 공간입니다. 이걸 형상화하려 했습니다. 노 전 대통령 묘역도 지면에서 1m 정도 들어올려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일반시민들이 쓴 추모글을 새긴 박석을 깔 예정입니다. 새겨놓은 글귀는 시간이 흐르면서 닳아 없어지겠지요. 그게 마땅하다고 저는 봅니다. 세월과 함께 닳아 없어져서 기억만 남는 것 말입니다. 저는 유족과 기념사업회 측에 국민의 신청을 받아 직접 박석을 나르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답을 기다리는 중이에요. 현재는 지석과 묘역을 표시하는 30m 길이의 곡장이 설치된 상태이고 묘역 전체 흙다지기 등의 기반공사는 끝났습니다. 곡장의 재료로는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녹이 스는 내후성강판을 사용했는데 이걸 60m로 늘릴 예정입니다. 묘역 주변에 소나무를 심어야 하고 박석에 추모글을 새기는 과정이 시간이 좀 걸릴 듯한데, 이 작업만 끝나면 금세 완료될 거라고 봅니다. 내년에 1주기에 맞춰 끝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동안 많은 설계작업을 진행하셨는데 망자를 위한 공간을 설계하기는 이번이 처음 아닌가요?

“납골당을 설계한 적은 있지만 이런 류의 묘소는 처음 설계해봅니다. 사실 죽은 자를 위한 공간에 지극히 관심이 많습니다. 세계 각국의 묘지순례를 다니기도 하고 자료도 많이 모았어요. 우리나라의 장묘문화는 뜯어고칠 게 상당히 많습니다. 

들어가고, 기다리고, 참배하는 ‘자발적 이방인을 위한 묘역’

우리나라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죠. 그러나 일본만 하더라도 시내에 묘지가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일상생활 공간에) 묘지가 없어서 도시가 경건하지 못하다고 봐요. 죽은 자와 가까이 있다는 것은 산 자에게 삶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거든요.”

-이제 ‘승효상=빈자의 미학’과 동의어가 될 정도입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여전히 ‘빈자의 미학’은 낯선 개념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미학이 아니라 가난할 줄 아는 이들의 미학이라는 뜻입니다. 돈이 있다고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절제하고 검박할 줄 아는 사람들을 지칭하죠. 집을 지을 때도 남보다 작은 집을 짓고, 남하고 나눌 수 있는 집을 지으라고 하는 게 빈자의 미학이에요. 저는 건축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건축물의 공공적 가치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개인이 자비를 들여 자신의 집을 짓는다 하더라도, 건축주는 건물에 대한 사용할 권리만 있을 뿐 건축물 자체의 소유권은 사회와 시민에게 있다고 봐요. 이를테면 대학로 샘터 사옥 1층을 보십시오. 비어있습니다. 사람들은 거기서 누군가를 기다리기도 하고 대학로 뒷길로 가는 지름길로 이용하기도 해요. 공간을 시민에게 내어주니까 오히려 남은 장소가 돋보입니다. 건축에서 공공적 가치를 키우는 것이 바로 빈자의 미학의 골자라 할 수 있습니다.”

-건축은 건축가의 예술작품인 동시에 자본을 가진 건축주가 있어야만 진행되는 예술이기도 합니다. 건축의 공공적 가치를 말하는 ‘빈자의 미학’론은 건축주들에게 호응을 얻기 쉽지 않았을 듯 한데요.

“물론입니다. 처음엔 공감 받지 못했죠. 건축주와 처음 만나서 ‘이 집은 당신 집이 아닙니다’라고 선언을 하면 욕을 하면서 나가버리더군요. 일감이 없어서 힘들었지만 버티는 데는 김수근 선생 휘하에서 워낙 이력이 났어요. 그렇게 버티다보니 다시 찾아오시는 분들도 계시죠. 지금도 이런 생각에 동의하는 건축주들과 진행합니다.”

-‘빈자의 미학’은 어떤 계기를 거쳐 만들어지고 다듬어졌습니까.

집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사회와 시민에게 소유권

“제가 공간건축에서 15년을 있다가 독립했습니다. 김수근 선생 생전에 12년, 사후에 3년 있었지요. 15년간 김수근 건축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제 건축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해서 독립 후 2년 정도는 굉장히 방황했습니다. 어느날 달동네를 지나가는데 그 풍경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사실 제가 어린 시절 달동네에서 살았거든요. 한동안 이걸 잊고 있었던 겁니다. 그걸 다시 생각하니 몸이 편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달동네란 달동네는 모두 보러 다녔습니다. 달동네 곳곳에 건축의 지혜가 담겨 있음을 알았습니다. 가난하니까 작고, 나눌 수밖에 없겠죠. 골목길이 마당이 되고 놀이터가 되고 창고가 되는 등 달동네에서 공동체를 봤습니다. 현대건축이 다시 집어내야 할 덕목이 이것이 아닌가 생각했고 파헤쳐보니 이미 해외의 건축 선각자들은 이런 작업을 하고 있더군요. 그때부터 다시 건축을 시작했다 할 수 있습니다. ‘빈자의 미학’이라는 콘셉트를 세우고 거기 맞춰 건축을 하겠다 했죠.”

-개인적으로 여태껏 진행했던 건축작업 중에서 가장 의미있는 작업은 어떤 것인가요?

“수졸당(1992)이 가장 큰 의미가 있죠. 아주 싸게 지은 집인데 복집이 됐죠. 설계비도 제대로 없어서, 그때 받은 게 저 현판이에요.(그는 사무실 벽에 걸려있는 현판 ‘이로재’를 가리켰다.) 뜻이 하도 좋아서 건축사무소 이름으로까지 쓰고 있죠. 그집 완공하던 날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이 나와 밀리언셀러가 되면서 거부가 되셨죠. 문화재청장도 하시고….(웃음) 지금 보면 허점투성이인 건물이지만 그 집은 ‘빈자의 미학’에 바탕해서 승효상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설계한 첫번째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승효상 건축’하면 붉은색으로 부식되는 내후성강판을 사용한 건축물을 떠올립니다. 이번 묘역에도 곡장으로 내후성강판을 사용하셨다고 했는데, 이 재료를 웰콤시티 사옥 등에 사용해 다수의 건축상을 받는 등 호평을 얻었습니다.

골목이 마당과 창고가 되는 달동네는 ‘빈자의 미학’ 전형

“건축의 물성, 재료의 물성을 발견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건축가로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사실 내후성강판뿐 아니라 노출콘크리트, 드라이비트, 현무암, 목재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붉은색 강판은 내후성강판이라고 하는 재료인데요. 처음엔 녹이 슬지만 일정 단계가 지나면 더 이상 부식이 진행되지 않아 도장비 등 건축비를 줄일 수 있는 재료예요. 외환위기로 힘들던 시절, 처음 국내에 들여와 써봤는데 요즘엔 많이들 쓰죠. 시간이 흐르면서 낡아가고 자연스러워지는 물성이 좋아요. 개인적으로 작가 리처드 세라, 알베르토 자코메티, 칼 안드레 등의 작품을 좋아하는데 자신의 의도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최대한으로 압축해 표현하는 부분을 높이 칩니다. 형태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간이 가진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제 의도를 극대화하기 위해 이에 맞는 재료를 골라 사용했습니다.”

-건축의 공공적 가치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현재 한국의 주요 도시에서 진행되는 공공디자인에 대해선 어떻게 바라보고 계십니까.

“공공디자인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말이에요. 공공영역에 관한 디자인이라고 풀이는 합디다만 뜻이 불분명하니 개념도 분명치 못하죠. 어떤 작업이든, 공간적 개념을 품고 있다면 반드시 건축가가 함께 작업해야 한다고 봐요. 건축가는 배제된 채 간판 바꾸고 벽화 그리는 것이 공공디자인은 아니죠.”

-올해로 이로재 건축사무소를 내신 지 20주년이 됐습니다. 스스로 지난 20여년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뚜렷한 건축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일관성 있는 작업을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20주년을 기념해서 작품집과 강의록을 모아 책을 냅니다. 강의록의 제목은 <터무니>에요. ‘터무니없다’고 할 때의 바로 그 터무니입니다. 참 좋은 단어예요. 터에 새겨진 무늬라는 뜻이거든요. 우리 선조들의 언어를 살피면 이유나 근거를 댈 때 땅과 관련된 단어를 사용하곤 했습니다. 건축의 모든 해답, 실마리도 땅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축설계 역시 땅에 의거해 기록을 찾고 새로운 무늬를 새기는 작업이라 할 수 있죠.”

건축과 건설이 동의어로 통하는 대한민국. 이 풍토를 바꿔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현재의 건축교육과 제도라고 그는 인터뷰를 통해 강력히 비판했다. “건축이 시대를 반추하고 시대를 바로잡도록 의미있는 일을 하는 것이 지식인으로서 건축가의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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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작은 삼류였다. 리스회사 산은캐피탈 팀장을 거쳐 2002년 늦깎이 펀드매니저로 입문했을 때만 해도 여의도 증권가에서 그를 주목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증권사나 운용사 출신도 아니고 리스사에서 10년을 굴러먹다가 펀드매니저가 된 사람, 더욱이 운용사가 아니라 이름 없는 자문사(유리스투자자문) 매니저가 된 사람을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요즘 여의도에서 뜨는 신설 투자자문사 가운데 한 곳인 브레인투자자문을 창업한 박건영 대표의 시작은 이랬다. 유유상종이다. 삼류는 늘 삼류끼리 어울리기 마련. 유리스 시절 박 대표와 어울린 애널리스트들은 온통 신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꿈이 있었다. 그들은 만날 때마다 주문을 외듯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삼류끼리 열심히 해서 꼭 일류가 되자." 신출내기 매니저는 발이 닳도록 뛰어다녔다. 수시로 상장사 관계자들을 만나 귀동냥을 하고 불철주야 공부했다. "진심을 가지고 일에 매달리니까 결국엔 문이 열리더군요." 맞는 말이다. 박 대표는 훗날 미래에셋 주식운용본부장으로 황금기를 누렸다. 2005년 대한민국 펀드대상을 수상했고, 2006년에는 증시를 움직이는 글로벌파워 3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와 어울리던 삼류 애널리스트들도 스타 반열에 올랐다. 정창원 애널리스트(대우증권)는 한국을 대표하는 반도체 전문가가 됐고, 조용준 애널리스트는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상무)으로 영전했다. 박 대표의 성공 스토리를 잠시 들여다보자. 2003년 초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도 아닌 보잘 것 없던 한 조선사가 무명 매니저의 눈을 사로잡았다. 박 대표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종목은 다름 아닌 현대미포조선"이라고 말했다. "당시 현대미포조선은 사업 구조를 재편하는 중이었습니다. 대형 조선사와 달리 선박 중에서도 PC선(석유화학운반선)에 특화된 구조를 지향했죠. 잘나가던 수리 사업을 접고 새로운 사업으로 개편하는 과감성, 대형사가 잘 하지 않는 틈새시장을 노린 차별화 전략, 이런 게 눈길을 사로잡았죠." 당시 현대미포조선 주가는 5000원. 박 대표는 무모하리 만큼 현대미포조선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보통 잘 알려지지 않은 종목은 1~1.5% 정도 담는 게 관례였지만 박 대표는 무려 8% 가까이 현대미포조선에 '올인'했다. 어쩌면 이 같은 무모함은 그가 비주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선택은 자칫 실패로 돌아가는 듯했다. "2004년 초에 갑자기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사건이 발생했죠. 곧바로 북핵 문제가 불거졌어요. 주식시장이 요동쳤습니다. 현대미포조선이 덩달아 깨지기 시작했죠." 악몽 같은 에피소드의 시작이다. "그땐 정말 죽을 맛이었습니다. 고객에게 너무 미안했고요. 내 고집이 과했던 것은 아닌가 혼자 되묻곤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너무 좋은 주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더 참아보자고 생각했죠." 엄동설한이 지나면 봄이 오는 법이다. 주식시장이 회복기에 접어들면서 가장 가파른 상승세를 탔던 주식이 바로 현대미포조선이다. 5000원에서 1만8000원, 1만8000원에서 8만원으로 오르더니 급기야 2007년 말엔 40만원으로 주가가 치솟았다. "유리스와 미래에셋, 트러스톤자산운용으로 회사를 옮기면서도 현대미포조선은 항상 저와 함께했던 종목이었습니다." 유리스 시절 현대미포조선으로 대박을 낸 박 대표는 2004년 미래에셋에 전격 스카웃됐다. 미래에셋에서도 인디펜던스와 디스커버리 등 대표 펀드를 운용하면서 성공가도를 달렸다. 트러스톤자산운용으로 옮긴 후엔 '칭기스칸펀드'로 또 한번 유명세를 탔다. 트러스톤에서 승승장구하던 박 대표는 올해 초 '독립'을 선언한다. 실물경기와 증시 불확실성이 높은 가운데서도 "2분기에 큰 장이 설 것"이라며 트러스톤을 나와 투자자문사를 세웠다.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다. "지난해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 이후 각국 정부가 유동성을 푸는 과정을 보면서 결국 주식시장으로 돈이 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박 대표는 창업 6개월 만에 5000억원을 끌어모을 정도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박 대표는 투자가 집중되는 업종은 투자 리스트에서 철저히 배제시킨다. 2007년 당시 현대중공업과 STX 등 대형 조선사들의 증설 소식이 연일 신문을 도배하자 박 대표는 이들을 경계했다. 또 한 가지, 그는 늘 '한 단계 도약할 기업'을 찾는 데 시간을 투자한다. 이런 맥락에서 짐 콜린스의 명저 '좋은 기업에서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는 그의 투자 바이블(Bible)이다. ■ 약력 △경북대 경영학과 △산은캐피탈 시장팀장 △유리스투자자문 주식운용본부장 △미래에셋자산운용 주식운용본부장 △트러스톤자산운용 공동 대표 △브레인투자자문 대표 [남기현 기자 /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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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박경철, 지금 필요한 리더십을 말하다

 

10월 24일 한국리더십센터가 개최한 '글로벌 리더십 페스티발'에 안철수 KAIST 교수와 박경철 방송 진행자 겸 안동신세계클리닉 원장이 참석해 이 시대에 필요한 리더십을 논했다.

나란히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바 있는 두 명사는 존 사임스 Patchamama Alliance 원장, 김경섭 한국리더십센터 회장, 이슬기 가야금 연주자에 이어 무대에 올랐다. (존 사임스는 세계 각국을 돌며 강연함으로써 지구 환경을 지속하는 일에 힘쓰며, 김경섭 회장은 개인과 비즈니스 코칭 확산에 노력하고 있다. 이슬기씨는 가야금과 현대 악기를 접목해 최초로 크로스오버 가야금 앨범을 발표한 연주자이다.)

두 명사가 등장하자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많은 이들이 이 시간을 기다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방적인 강연보다 서로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대담을 제안했다는 안 교수와, 대담자의 역할보다 좋은 질문자의 역할을 하겠다는 박 원장의 화답으로 대담이 시작됐다. ‘이 시대에 필요한 리더십’이라는 약간은 무거운 주제로 열린 대담이었지만 곳곳에 웃음의 포인트가 있었다.

박경철 원장(이하 박): 예전에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신 적 있지 않으십니까? 거기 왜 나가셨습니까?

안철수 교수(이하 안): 카이스트 교수가 되겠다고 생각했던 맥락이랑 같습니다. 안철수연구소 CEO를 그만두면서 내가 경영하는 회사 하나가 잘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잘 돼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에게 도전의식을 불어넣어주고 개인뿐 아니라 사회를 볼 수 있게 해주고 싶었어요. '무릎팍도사'에서도 도전이나 사회 전체를 생각해볼 기회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반응이 폭발적이어서 고생을 좀 하고 있습니다. 박 원장님은 어떠세요?


: 저는.. 저는.. 안철수도 나왔는데 어떻게 네가 거절하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ㅎㅎ 예전부터 궁금했던 것이 있는데, 예전에 의사셨잖아요. 그런 경험이 리더십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 제가 경영을 하기 전에 의사였고, 프로그래머였죠. 이것들은 개인만 잘하면 되는 전문 직종인데, 그러다가 전혀 몰랐던 경영 분야를 하게 됐잖아요. 그러다 보니 전공자들이 던지지도 않을 질문을 던지게 되더라고요. 다른 분야에서 보면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고 기존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다시 한번 질문할 수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됐고, 그런 것이 지금의 안연구소가 만들어지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 많은 사람들이 좋은 리더십을 찾는 것이 역설적으로 그런 리더십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왜 그런 리더십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 정답이 있을 수는 없을 거 같아요. 리더십이라는 자체가 고정된 것이 없어요. 사회가 정말 급변하다보니 불확실성이 커요. 그런 가운데서 정말로 우리 희망인 리더들의 존재가 적다 보니 갈망이 더 커지는 것 같아요. 탈출구로 리더십을 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 그런 의미에서 좋은 리더십이 나와야 할 텐데, 사회 속에서 리더들을 만나다 보면 당혹스럽습니다. 새로운 리더십을 찾는다면? 


: 예전에는 일부 중요한 정보를 기득권이 독점했어요. 그런데 21세기에는 정보나 힘을 일반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게 됐죠. 그래서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관점에서 리더십을 바라보자면 20세기까지의 리더십은 아주 외향적이고 리더십이 있게 보이는 사람이 어떤 지위를 가지면 그 지위가 주는 고급 정보, 돈 등이 리더십을 발휘하게 해주었어요. 21세기 리더십은 다른 것 같아요. 리더 한 사람의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서 나오는 것 같아요. 대중이 리더를 보고 저 사람을 따라갈 만한 사람인가를 판단하고 따라가는 것 같습니다. 결국 리더십의 요체는 대중이 주는 것이죠.


: 지금 말하신 리더십은 수직이 아닌 수평 리더십을 말하신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모 그룹 회장님이 ‘1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그 말 속에 들어있는 무서운 함의가 무엇이냐 하면 1 명이 1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지만 대신 그 한 명이 1만 명이 먹을 것을 혼자서 먹지 않습니까. 저는 천 명의 발걸음을 한 걸음씩 같이 옮길 수 있는 그런 리더십을 규범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한 사람이 사회에서 성공하면 그 사람에게만 집중되는 거 같아요. 그런데 사실 시각을 넓게 바라보면 그 사람이 성공한 것은 사회가 그 사람에게 기회를 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거든요. 자기가 성공하기까지 노력과 재능은 인정하지만 그것을 100% 자기 공으로 돌리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해요. 자기 때문에 기회를 얻지 못한 동료를 생각하는 것이 수평적 리더십의 근간이 되는 것 같아요.


: 우리가 주로 리더와 관리자를 혼동하지 않습니까? 이 두 가지의 차이점은 뭡니까?



: 관리자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돈 안에서 어떤 일을 이뤄가는 사람이죠. 그러니까 목표지향적이고 거기에 사람이 개입할 여지는 별로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리더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의 적극적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사람이죠. 관리자는 일 자체가 목적이라면 리더는 사람 자체가 목적인 거죠.
리더는 각자가 가진 능력의 합보다 더 많은 것을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말씀을 듣다보니 저는 지금껏 리더를 만나기보다 굉장히 많은 관리자들을 만난 것 같은데.. 리더는 어떤 사람이 됩니까.


: 정형화된 이론은 없지만 세 가지는 갖춰야 해요. 첫째, 철학. 자기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해요. 자기를 모르면 다른 사람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죠. 둘째는 비전이 있어야 해요. 자기가 일하는 분야를 어떻게 해나갈 거라는 비전이 필요한 것이죠. 셋째는 실행 능력이 있어야 해요. 말보다 행동이 중요한 것이죠.


: 문제는 이 세 가지를 갖추더라도 일관성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안철수 의사, 안철수 교수 .. 제가 볼 때는 안철수라는 사람이 일관성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저는 예전부터 언론에서 계속 노출된 사람인데, 나름대로 보람이 있다고 하면 도중에 한 번도 말을 뒤집거나 이해타산에 맞게 이야기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아무리 힘들어도 그 당시에 옳다고 믿는 말들을 해왔어요. 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고민하고 제 정체를 스스로 파악하고 있다 보니 제가 마음에 이끄는 대로 이야기를 해도 일관적이게 되더라고요. 어떻게 저를 잘 알게 됐냐면, 굉장히 중요한 선택을 할 때 보니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겠더라고요. 예를 들면, 의대 교수를 그만두고 안연구소를 창업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런 순간이 없으면 자기를 잘 몰라요. 그런 순간은 내가 나랑 친해질 수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 지금 말씀을 듣다보니 조정래 선생님 말씀이 떠오르네요. ‘자기 자신의 노력이 자신을 감동시킬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우리가 두려운 것은 과정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올까 두려운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 강물의 세기를 알려면 신발을 벗고 강물로 뛰어들어가야 알 수 있겠죠. 혹시 결과가 원하지 않았던 것이라 해도 그 시간은 굉장히 값진 시간이었을 거예요. 삶에 연관이 없을 것 같던 부분도 다 관련이 있거든요.


: 요즘 고등학교 학생들을 만나보면 "기회를 균등하게 해주세요."라는 말을 해요. 사실 기성세대는 기회가 풍부해서 자신의 노력을 탓했는데, 요즘은 성실하게 노력해도 기회가 없는 경우가 많죠.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아닐까요?


: 답답함이 앞서는 사안인데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공감대 형성을 해 풀어나가야 해요. <영혼이 있는 승부>에 썼듯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하늘이 줄 수 있는 일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거든요. 개인의 노력을 넘어선 것은 하늘이 주시는 영역 같고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죠.


대담을 마무리 지으며 박 원장이 안 교수에게 “전국 대학을 돌며 젊은이들과 소통하는 강의를 해보지 않겠냐”고 공개적으로 제안했고 안 교수는 “중요한 기부 중 하나는 시간 기부인 것 같다. 고민해보자”고 답했다. 이에 그곳에 모인 많은 학생들의 환호와 함께 대담은 마무리지어졌다.


한 시간 정도 그들의 짧은 대담을 들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은 든든해졌다. 리더에 대해 막연히 알고 있던 생각의 틀이 깨어지는 순간도 있었고, 마음 속에 사그라지던 도전 의식이 불타오르던 순간도 있었다. 그 순간을 얻는 기쁨만큼이나 좋았던 것은 안철수 교수의 솔직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답변을 이끌어내기 위해 좋은 질문을 던진 박경철 원장의 예리함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Ahn 

대학생기자 허보미 /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봉긋한 꽃망울, 스쳐지나가는 바람에도 애정 갖기.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간직한 채 글로 소통하길 꿈꾼다.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가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에 초청돼 27일 저녁 '성찰하는 진보'에 대해 특강하고 있다.
ⓒ 남소연
조국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 회원 등이 27일 저녁 서울 상암동 누리꿈스퀘어에서 열린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 초청 특강을 듣고 있다.
ⓒ 남소연
10만인클럽

"얼굴 잘생겼고, 글도 잘 쓰고, 게다가 생각도 진보적이기까지…"

 

소개를 받는 조국(44) 서울대 법학부 교수의 얼굴에 약간의 붉은 기운이 돌았다. '엄친아'스런 본인 소개에 쑥스러워하던 그. 27일 저녁 7시 상암동 누리꿈스퀘어 대회의실에서 열린 '10만인클럽 특강' 두 번째 초대 손님은 바로 조국 교수였다.

 

그는 부인하겠지만 사실 조 교수는 '엄친아'라는 말이 세상에 나오기 훨씬 전부터 그 자격을 완벽하게 갖춘 '원조 엄친아'였다.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법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버클리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줄곧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며 다양한 사회활동에 참여해 왔다.

 

2000년 이후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장을 지내며 시민운동에 발을 내디뎠고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의원회 자문위원을 역임했다. 현재는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과 대법원 양형위원회 위원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엔 대중에게 호감을 주는 외모와 말솜씨 덕에 정치권으로부터 심심치 않게 '러브콜'을 받고 있기도 하다.

 

저술활동도 활발하다. 조 교수는 언론 매체에 활발하게 칼럼을 쓰는 한편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2001년), <성찰하는 진보>(2008년), <보노보 찬가>(2009년) 등 사회적 의제에 대한 진보적 시각을 담은 책들도 꾸준히 세상에 내놨다. 

 

이날 강연에서 조 교수는 '성찰하는 진보, 다시 희망을 말하다'를 주제로 깊이 있는 분석을 들려줬다.

 

"MB 지지율 상승, 왜?... 진보도 밥 먹여줘야 살아난다"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가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에 초청돼 27일 저녁 '성찰하는 진보'에 대해 특강하고 있다.
ⓒ 남소연
조국
 

조 교수는 먼저 "성찰하지 않는 진보의 집권은 가능하지도 않고, 운이 좋아 집권하더라도 대중들이 실망해 다시는 진보진영에 표를 주지 않겠다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라며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도 왜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오르는지 진보진영이 돌아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는 시쳇말로 이명박 정부가 또는 이명박 대통령 개인이 아무리 '닭짓'을 해도 정권이 진보진영으로 오지 않는다는 의미"라며 "인권이,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고 하는 사람들에게 '밥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오답 대신 '진보가 밥을 먹여준다'는 답을 내놓아야 진보적 가치를 국민적 가치로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광장의 정치·거리의 정치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동력이지만 그것만으로 세상이 바뀌는 시대는 지나갔다"며 "진보적 가치가 맞는지, 실현 가능한지를 따지는 '까다로운 소비자'를 진보진영이 설득하고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또 "이명박 정부가 중도실용은 아니지만 그 프레임 자체는 잘 잡았다고 생각한다"며 "중도실용이라고 먼저 선언하면 주위에서 아무리 아니라고 비판을 해도 먼저 선언한 사람이 이기게 돼 있다. 그런 논쟁이 벌어지는 것 자체가 (이슈를) 선점한 사람의 승리로 흐르는 게 현대 정치"라고 설명했다. 이어 "선거구제 개편 문제도 진보개혁세력은 그 프레임을 따라잡는 데 그치고 있다"며 "역설적으로 진보세력의 정치적 무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가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에 초청돼 27일 저녁 '성찰하는 진보'에 대해 특강한 뒤 '내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출마' 등 정계 진출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받고 있다.
ⓒ 남소연
조국

조 교수는 내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출마 등 정계 진출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일단 선을 그었다. 그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개입해야 하지만 정치인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라며 "정치에 뛰어들려면 대중들 앞에서 완전히 발가벗는 용기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아니다, 학자로서 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다"고 밝혔다.

 

이밖에 조 교수는 이날 이명박 정부의 중도강화론에 대한 비판, 민주연합론에 대한 생각, 진보가 나아가야 할 방향 등 여러 주제에 대해 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청년 대학생부터 노년층까지 자리를 메운 150여 명의 청중들은 그의 강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강연이 끝나고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는 다양한 질문들이 쏟아져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기기도 했다.

 

조국 교수의 강연을 주제별로 재정리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장례식 모드로 살 순 없다... 스톡홀름 신드롬 벗어나야"

 

"이명박 정부에 대한 이야기로 강연을 시작해야겠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최근 중도강화론·중도실용주의를 들고 나왔죠.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이후에는 관용과 화합을 제시했습니다. 다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지금 중도의 이름하에 진행되고 있는 정책을 보세요. 부자들 세금 깎아주고 간접세 등을 통해서는 약자들의 세금을 올리고 있습니다. 복지 예산은 깎고 있죠. 입시문제에 있어서는 '친학원' 정책을 일관되게 밀고 있어요. 재래시장 가서 어묵 사먹는다고 해서 중도친서민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차라리 호텔에서 초호화 요리를 먹더라도 정책만 친서민적이었면 좋겠어요. 그런다면 이 대통령이 달팽이 요리를 먹든 무엇을 먹든 아무도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요즘 '효자동 개가 울어도 이명박 때문'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데(좌중 웃음) 그만큼 사람들이 짜증이 난다는 것이겠죠.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오르고 있습니다.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이 돌아가신 후 수백만 명이 조문을 하고 광장에 수십만 명이 모여서 마음속에 비석 두 개를 세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오르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은 잘 이해가 안 가겠지만 이게 현실입니다. 함의는 무엇일까요? 시쳇말로 이명박 정부가 또는 이명박 대통령 개인이 아무리 '닭짓'을 해도 정권이 진보진영으로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 정부에 대한 불만이 올라간다고 해서 그다음에 진보진영이 집권하거나 진보적 가치가 저절로 실현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계속 장례식 모드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그들의 고통이 어디에 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풀어야하는지 대안을 제시하지 않으면, 그리고 그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사람과 조직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저는 서민대중들이 '스톡홀름 신드롬'에 사로잡혀있다고 생각합니다. 스톡홀름 신드롬은 인질들이 오히려 경찰을 적대적으로 대하고 인질범을 우호적으로 대하는 현상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서민적이지도 않고 중도실용적이지도 않지만 대중들은 자신들을 정말 구해줄 믿을 만한 존재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시장지상주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고 믿는 것이죠. 그래서 자신을 파멸의 길로 데리고 가는 정책을 수립하는 사람을 믿고 투표하는 겁니다.

 

지난 총선에서 김근태-신지호 후보의 대결에서 신 후보가 승리했는데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신 후보에게 표를 줄 수 있느냐고 비난한다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런 비난은 지식인들의 오만입니다. 대중들은 투표소에서 김근태를 안 찍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분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빚은 다 갚았다고 생각한 것이죠. 진보진영이 사람들의 삶을 책임질 수 있다는 비전과 정책을 제시하지 못한 잘못이 있습니다. 진보진영은 권력을 잡을 경우 어떻게 사람들의 고통을 줄이고 꿈을 실현해 줄 것인지, 대중들이 이해하고 믿을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그것을 하지 못한다면 실패는 예정돼 있다고 봐야 합니다."

 

MB 반대하면 다 모여라? 민주연합론의 실체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기자가 10만인클럽 초청으로 27일 저녁 서울 상암동 누리꿈스퀘어에서 열린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의 특강을 진행하고 있다.
ⓒ 남소연
오연호

"현재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 상황이 후퇴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미네르바에게 적용됐던 법률은 40년 동안 적용된 적이 없었고 좌파 우파를 떠나서 법률가라면 유죄가 될 수 없다고 봤습니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의 배임 혐의도 아무리 봐도 형법상 배임의 고리가 없었죠. 법원의 조정 권고를 받아들인 것이 유죄라면 법원의 조정이 다 없어져야 하는 것인데 엄청난 혼란이 올 것입니다. 법원에서 모두 무죄가 선고됐는데 파시즘 체제였다면 유죄 판결을 받았을 겁니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기소도 안 되는 사건이었죠.

 

과거 파시즘 정부 하에서는 법보다는 주먹이 가까웠습니다. 학생 시절에 시위하다가 관악경찰서에 끌려갔는데 경찰관에게 나에게는 묵비권이 있다고 하니 한 대 때리면서 '매를 벌어' 이러더군요.(좌중 웃음) 당시는 법이나 피의자의 권리를 이야기하면 더 때렸습니다. 지금은 주먹을 쓰지 않지만 법적인 절차를 밟아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무죄를 받을 줄 알면서도 기소를 함으로써 정치적·사회적 활동에 지장을 초래하도록 골탕을 먹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후퇴를 막자며 민주연합론이 나온 모양입니다. 하지만 민주연합론은 생존의 프레임이지 승리의 프레임은 될 수 없습니다. 이명박 반대하는 사람 다 모이라는 것인데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모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말이 없고 그냥 다 모이라는 겁니다."

 

"영웅호걸의 시대는 끝났다, '쫀쫀한 사람'들이 주역"

 

"'촛불 시위'는 정치적 한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이나 중국 등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밑으로부터 정권을 바꿔본 경험이 있기에 '촛불 시위'가 가능했던 겁니다. 그런 '광장의 정치', '거리의 정치'는 민주주의 동력이고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사회가 바뀌지 않습니다. 87년 전에는 광장의 정치만으로도 사회를 바꿀 수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변했습니다. 

 

'영웅호걸'의 시대는 갔습니다. 쫀쫀한 사람들, 다시 말해 까다로운 소비자들의 시대가 왔습니다. 예전 민주화 운동을 할 때는 영웅호걸이 외치면 사람들은 목숨 걸고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들은 쫀쫀하게 까다롭게 따집니다. 진보적 가치, 정책에 대해 그것이 맞는지, 현실성이 있는지, 예산은 어떻게 동원할 것인지 끊임없이 묻습니다. 그렇다고 쫀쫀하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까다로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진보적 가치가 국민적 가치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상품이 아무리 좋다고 외쳐도 사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보의 가치를 말하는 사람이 꼭 피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왕년에', '내가 학생일 때 이랬어'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현재를 삽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너무나 냉정해서 필요한 과제를 성취하고 밀고 나가면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미래를 향해 나아갈 뿐이죠. 제 수업을 듣는 대학교 1~3학년생들 5·16, 5·17, 5·18, 6·10 항쟁을 역사적 순서대로 말해보라고 어느 게 먼저인지 잘 모릅니다. 학생들에게는 과거보다 현재 '왜 88만 원밖에 못 받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진보는 자기편이 아닌 보통사람들이 어떤 고통을 가지고 있고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알고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 성찰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민주대연합을 통해 민주주의와 인권 회복하자는 것에 찬성하지만 핵심은 민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일자리의 문제, 교육의 문제 주거의 문제 세 가지를 풀어내야 합니다."

 

진보의 잃어버린 10년 올수도... 그래도 멋지게 잽 날리자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가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에 초청돼 27일 저녁 '성찰하는 진보'에 대해 특강한 뒤 참석자들의 질문에 대해 답변하고 있다.
ⓒ 남소연
조국

"인권이 밥 먹여주냐, 민주주의가, 진보가 밥 먹여주냐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진보진영의 답은 '밥보다 중요한 게 있다'였습니다. 맞는 말이지만 정답은 아닙니다. 이것은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답입니다. 진보가 밥을 먹여준다고 답을 해야 합니다. 진보는 어떻게 밥을 만들고 나누는지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문제는 대중들에게는 큰 틀에서 한번은 해결된 문제입니다. 후퇴하고 있지만 정치적 민주주의가 관철되고 있고 선거제도가 유지되고 대의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대중들의 고통의 중심은 이 문제가 아니라 밥의 문제가 중심입니다. 젊은 층은 졸업해서 어떻게 정규직 일자리를 잡을까가 최대 고민입니다. 지식인들이 이들에게 사회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토익만 공부한다고 하면 당신은 정규직이니까 그런 이야기 한다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입니다. 또 과거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민주화 인사들 이제 다 보상받지 않았느냐고 이야기 할 것입니다. 진보진영이 성찰하지 않고 이 문제에 답을 주지 못한다면 미래는 없습니다.

 

두 번째 연대의 문제가 남습니다. 진보는 집권여당 시절에도 소수파였습니다. 지금은 실권한 소수파가 됐는데 과연 연대 없이 다시 집권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국민의정부, 참여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보수와의 연대를 통해서 가능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마지막 인터뷰>에서 '못난 사람들끼리 연대하자'고 했는데 공감합니다.

 

지금까지는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진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섹시한 사람, 매력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최소한 주위 사람들에게 저 사람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사람은 맘에 든다는 이야기는 들어야죠. 그래야 진보적 가치를 국민적 가치로 바꾸는 것이 가능해 집니다.

 

2012년 진보진영이 패배할 수도, 승리할 수도 있습니다. 진보의 잃어버린 10년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더라도 멋지게 싸워보고 져야지 관객들도 다음 게임을 기대할 것입니다. 그게 아니고 '잽' 한방에 날아 간다면 완전히 관심에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진보진영은 성찰하고 연대하지 않으면 집권하기 힘듭니다. 그러지 않았는데 운이 좋아서 권력을 잡는다면 더 문제입니다. 대중들이 진보진영에 실망해서 절대 다시는 표를 주지 않는다고 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가 27일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에 초청돼 '성찰하는 진보'에 대해 특강한 뒤 참석자들과 함께 찍는 기념촬영에 응하고 있다.
ⓒ 남소연
조국

정한철 씨 -> 동수 (20세기파)
정제축 씨 -> 준석 (칠성파)

1993.7.8
부산일보 1993년 7월8일자 사회면 기사입니다.

폭력조직 행동대원이 심야에 가스총과 흉기를 든 괴한들로 부터 피습당해 숨졌다. 경찰은 현재 부산시내 곳곳에 성업중인 가라오케이권을 둘러싼 청부살해일 개연성이 큰것으로 보고 수사에 나섰다.
8일오전 0시5분 정한철씨(26. 신20세기파 행동대원, 부산시 남구 광안1동 상아빌라 105동) 와 나철균씨(26. 타임가라오케사장대리, 부산 중구 동광동 5가3)가 부산 중구 동광동 3가 타임가라오케 앞 길에서 신원불명의 20대남자 2명으로부터 피습당해 정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지고 나씨는 오른팔에 12바늘을 꿰메는 등 상처를 입었다.
나씨에 따르면 7일밤 11시 10분께 정씨가 타임가라오케를 찾아와 "후배에게 줄 차비 3만원만 달라"고 해 돈을 준뒤 정씨와 함꼐 포커게임등을 하다 40분뒤에 가라오케 밖으로 나온 순간 육교뒤에 숨어있던 괴한 두명이 가스총을 쏘고 식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는 것.
범인들은 정씨와 나씨가 도망치자 정씨를 뒤쫓아가 왼쪽 허벅지 3곳과 심장부위를 칼로 마구 찌른 후 부산시청방면으로 달아났다.
범인들은 21-22세가량에 키 175cm정도의 건장한 체격을 가졌으며 2명모두 스포츠형 머리에 흰색티셔츠를 입고 있었다고 현장목격자들은 밝혔다.
경찰은 정씨가 90년말 폭력배 일제소탕 때 구속됐다가 91년 10월집행유예로 출소한 후 부산 중구 남포동과 '완월동'사창가 일대에서 세력을 확장시켜온 점과 2년전 부산 서구 초장동에서 베토벤가라오케를 운영해 오면서 부산 서구 충무동 소재 모 가라오케주인과 원한관계에 있었다는 점을 중시, 조직 폭력배들간의 세력다툼 또는 가라오케 업권을 둘러싼 계획적 살인극일 개연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정상섭기자>

1995.12.24
폭력조직 `재건칠성파' 두목 검거

부산 서부경찰서는 24일 이권관계로 경쟁관계에 있는상대파 행동대 장을 살해하도록 지시한 서구 충무동 속칭 완월동을 주무대로 하는 폭력 조직인 `재건칠성파'의 우두머리 정제욱씨(30.무직.주거부정)을 붙잡아 살인 등혐의로 긴급구속했다.

지난 87년 부산의 폭력조직인 칠성파에 가입한 정씨는 지난 92년 12월 칠성파두목 등이 구속돼 조직이 와해되자 나머지 조직원 40여명을 규합, 재건칠성파를 결성한 뒤 지난 93년 7월 8일 0시께 부산시 부산시 중구 중앙동 3가 `김성수치과' 앞길에서 조직원 배창완씨(22) 등 3명으 로 하여금 중구 남포동 일대를 장악한 `신20세기파'의 행동대장 정한철씨 (27)에게 가스총을 쏜 뒤 흉기로 마구 찔러 숨지게 한 혐의 등을 받고 있 다.

재건칠성파 두목 정씨는 지난 93년 이 사건으로 전국지명수배를 받 아오다 최근경찰의 은행계좌추적으로 소재가 파악돼 이날 오전 10시40분께 경남 창원시 도계동에서 경찰과 격투끝에 붙잡혔다.

12/24(일) 23:27 입력

<검색 발췌>

영화 ‘친구’의 실존 인물은 그동안 거론됐던 부 산 칠성파 두목 이모씨(58)와 신20세기파 안모씨(50)가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그동안 영화계에서는 이씨와 안씨의 실화를 소재로 다뤘고,실제 안씨가 살해되지는 않았 으나 영화에서 살해된 것으로 처리됐다고 알려졌었다.최근 이들이 금품갈취 혐의 등으로 각각 실형 선고 및 구속되자 이들의 이야기가 화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두 사람은 조직원들에게 “나이 차이와 시대적 배경으로 미뤄,우리는 영화 친구의 실존 인물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또 살해사건을 포함해 영화의 스토리는 이 조직의 다른 인물을 다룬 것으로 확인됐다. 경 찰과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이 영화는 ‘부산 20세기파 한철희 살해사건’이 줄거리다. 한철희 사건은 친구였던 부산 칠성파 소속 정모씨(36·구속중)와 20세기파 한철희가 이권 을 둘러싸고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지난 93년 7월7일 칠성파 소속원들이 부산 미대사 관 문화원 부근 모 은행 앞에서 한씨를 칼로 난자,살해한 사건이다. 이 사건 직후 20세기 파는 ‘신20세기파’로 조직명을 바꾸었다.이 사건으로 정씨는 95년 12월24일 살인교사혐의로 구속된 후 10년형을 선고받았다.현 재 서울영등포교도소에 수감 중인 정씨는 2004년 만기출소할 예정이다.또 한씨를 살해 한 칠성파 소속원 두 사람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이들을 검거했던 부산 서부경찰서 강력계 김모 형사는 “한씨와 정씨가 중학교 다 닐 때 한씨는 부산 D중학교에서 주먹이 가장 센 ‘짱’이었으며,정씨는 T중학교 ‘짱’으 로,두 사람은 학교는 달랐지만 라이벌 관계의 절친한 ‘친구’였다”고 밝혔다.그런 두 사람의 운명이 갈라진 것은 한씨가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곧바로 주먹세계 로 뛰어들었고,정씨가 H고등학교 2학년을 다니다 중퇴하면서였다.주먹세계에 먼저 뛰어 든 한씨는 20세기파 소속원으로,고등학교를 자퇴한 정씨는 뒤늦게 칠성파 소속원이 되었 다. 당시 부산의 대표적인 조직폭력배인 칠성파와 20세기파는 남포동과 자갈치시장 등을 기점 으로 세력다툼이 한창이었다.두 사람은 각종 이권을 둘러싸고 세력간의 싸움에 앞장서면 서 결국 우정에 금이 갔다.이 과정에서 한씨는 정씨측에 의해 살해됐다.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김형사는 당시 한씨를 살해한 범인들을 검거,조사를 벌이는 과 정에서 1년6개월 만에 정씨가 살해를 교사했다는 혐의를 잡아냈다.김형사는 살인교사를 부인하던 정씨에게 “친구를 죽이라고 교사한 사실을 인정해라.부인하는 것은 진정한 깡 패가 아니다”며 다그쳤다.그제서야 정씨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고 김형사는 당시를 회상했다. 김형사는 “친구 영화에서 유오성(준석) 역이 정씨며,장동건(동수)은 한철희,대학생 역 을 맡았던 사람이 바로 곽경택 감독”이라며 “당시 정씨를 검거했던 자신도 이들을 잘 아는 선배였다”고 말했다.김형사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영화 같은 지난날이었다” 고 당시를 회고했다.

<동아닷컴>
 
‘친구’로 번 돈 친구 위해 썼다?
곽경택 감독 조폭자금 지원설 파문 … 갈취냐 자발적 배려냐 ‘검찰도 답답해!’
 
  연이은 고소와 투서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는 곽경택 감독(왼쪽). 영화 ‘친구’를 만들며 ‘진짜’ 친구가 된 곽감독과 주연배우 유오성은 사소한 시비로 ‘원수’사이가 됐다.
”너희들이 ‘친구’를 알아!”
지난해 영화 ‘친구’로 관객 동원 820만명의 신화적 흥행기록을 세운 곽경택 감독이 ‘범죄단체’에 자금을 지원한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영화 ‘친구’의 콤비였던 영화배우 유오성측과의 저작권 침해 시비 이후 또다시 불거진 이번 검찰 수사 파동은 7월24일 부산지방검찰청에 접수된 투서에서 비롯됐다. 김모씨 명의로 작성된 이 투서는 “영화 ‘친구’의 제작사와 배급사가 부산지역 최대 폭력조직인 칠성파의 협박을 받고 5억원을 범죄단체에 지원했으며, 곽감독이 이를 중개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수사에 들어간 검찰은 계좌추적 결과 제작사와 배급사측에서 지난해 8월 곽감독에게 각각 2억원과 3억원을 입금한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검찰은 이 자금이 조직폭력배의 범죄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는지 여부에 대한 조사를 위해 올 8월 피고소인 자격으로 곽감독을 소환했으나, 그는 신작 영화 ‘똥개’ 촬영을 위해 외국에 나갔다 들어오면서 이미 잠적한 상태였다. 검찰이 그에게 지명수배를 내린 시점이 바로 그때였다.
사건 발단 ‘투서’ 주인공 누구냐
문제가 커진 것은 11월13일 한 중앙일간지가 검찰의 피고소인 수사가 이뤄지지도 않은 시점에서 ‘곽경택 감독 조폭 연루 수사, 영화사서 5억 갈취, 부산 칠성파에 전달’이라고 보도하면서부터였다. 잠적해 있다던 곽경택 감독은 그의 대리인 양중경씨(36)를 통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양씨는 곽감독의 부산고 동문으로 그와 함께 영화 제작사 진인사필름을 만든 인물. 영화 ‘친구’에도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깜짝 출연하기도 했다.
곽감독은 양씨를 통해 “지난해 8월 제작사와 배급사로부터 ‘친구’의 흥행 수익 중 감독에 대한 보너스 명목으로 5억원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중 2억5000만원을 친구 정모씨(영화 속 준석의 실제 인물)의 선배에게 줬지만 조직폭력배나 범죄단체의 자금으로 준 것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정씨는 칠성파 행동대장으로, 1993년 7월 초 자신이 속한 칠성파와 세 싸움을 벌이던 신20세기파 중간보스 한모씨(36·영화 속 동수)를 조직원을 시켜 살해한 장본인. 그 후 정씨는 살인교사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고 8년째 복역하고 있다. 영화 ‘친구’는 당시 부산 중구 동광동 거리에서 벌어졌던 살인사건을 소재로 삼은 영화로 정씨와 한씨, 곽감독의 전기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곽감독은 “어렵게 살고 있는 친구(정씨)에게 도움을 주려는 생각밖에 없었고 친구가 ‘믿을 만한 선배에게 돈을 주라’고 사정을 해 지난해 8월 말쯤 한 호텔 커피숍에서 그를 직접 만나 2억5000만원을 전달했다”며 “선배라는 사람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으며 그가 칠성파 중간보스라는 사실도 나중에 알았다”고 말했다. “설사 친구가 아니라 하더라도 까발리기 싫은 자신의 과거를 영화화하는 데 흔쾌히 응해줬고, 대본을 쓰는 데도 도움을 준 원작자에게 흥행 보너스를 나눠준 게 무엇이 잘못이냐”는 게 곽감독측의 주장. 영화 ‘친구’에서 마약에 찌든 준석에게 상택(곽감독 자신)이 “성공하면 택시 한 대 뽑아준다”고 했던 약속을 지킨 셈이다.
하지만 검찰이 주목한 점도 바로 이 대목이다. 정씨를 도와주려면 그 가족에게 직접 돈을 전달하지 하필이면 조폭 집단의 중간보스에게 돈을 전달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
이에 대한 곽감독측의 반박은 이렇다. “이야기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정씨는 부인과 떨어져 산 지 벌써 8년이 지났고, 그가 부인 외에 다른 사람에게 돈을 주라고 한 사실이 알려지면 부인과 자식이 얼마나 상심할 것인가를 걱정했다. 정씨도 사실은 부인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특히 이 문제와 관련, 곽감독은 전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렵게 살고 있는 친구의 부인 생각이 나 부인에게도 얼마간의 돈을 전달했다”는 것. 즉 정씨의 선배에게도 돈을 줬지만 가족들에게도 생활자금 일부를 지원했다는 이야기다.
언론의 보도 내용에 펄쩍 뛰기는 제작사와 배급사도 마찬가지. 영화 ‘친구’의 배급사인 코리아픽처스 대표 김동주씨는 “협박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곽감독에게 건네진 5억원은 총 200억원의 흥행수익 중 감독 몫의 러닝 개런티며 당시 조명, 촬영감독은 물론 조연배우들에게까지 보너스가 지급됐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납득이 안 간다”고 반발했다. 그는 또 “곽감독은 5억원에 대한 세금도 다 냈고 증거도 있다”며 “다만 얼마를 받았는지 밝히지 말라고 부탁해 그렇게 한 것뿐”이라고 덧붙였다.   (계속)
‘친구’ 어디까지 사실인가
가정환경 다르고 … 칼세례·조폭 우정 모두 ‘과장’


영화 ‘친구’에서 동수가 살해당하는 장면. 너무 잔인하다는 평을 받았다.
영화 ‘친구’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과장일까.

영화 속 준석의 실제 주인공인 정모씨(36) 사건을 수사한 부산지방경찰청 소속 형사들은 한결같이 “아무리 픽션이지만 실제보다 부풀려진 측면이 너무 많다”고 주장한다. 결국 조직폭력배의 우정에 대한 지나친 미화가 곽감독에게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킨 단초가 됐다는 게 그들의 판단.

실제 정씨의 칼에 맞아 죽은 것으로 묘사된 한모씨(36·영화 속 동수)는 정씨의 친구이기는 하지만 친한 사이는 아니었고, 영화에서처럼 칼에만 수십 차례 찔린 게 아니라 가스총에 맞고 기절한 뒤 칼에 네 번 찔렸을 뿐이다. 당시 한모씨를 칼로 찌른 행동대원도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다는 게 형사들의 증언. 출신성분에도 차이가 컸다. 영화에서처럼 정씨의 아버지는 부하에게 배신당한 조폭의 두목이 아니라 볼링장 사장이었으며, 한씨의 아버지도 장의사가 아니었다는 것. 다만 한씨가 싸움판에서 밑바닥부터 ‘별’을 달아가며 큰 ‘성실파’ 건달이었다면 정씨는 ‘낙하산’ 건달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돈과 머리를 이용해 급성장했다는 게 형사들의 설명이다.

영화 친구에서 준석을 구속시킨 서형사 역의 실제 주인공 서도석 경사(부산지방경찰청 형사기동대)는 “영화 친구를 계기로 조폭영화가 활개를 치고, 모방 범죄가 잇따를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며 “아무리 영화라도 그 내용의 사회적 반향을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조폭영화’ 붐을 일으킨 곽감독이 조폭자금과 연루돼 수사를 받는 것이 과연 우연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끝)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마지막 일기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가 21일 오전 공개됐다.

올 1월 1일부터 6월 2일까지 작성된 40쪽 분량의 일기장에는 이희호 여사에 대한 사랑 외에 남북문제 걱정,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및 용산참사 등에 대한 신랄한 정부비판이 담겨 있어 거센 후폭풍을 예고했다.

김 전 대통령측은 이 일기를 책자로 작성, 빈소를 찾는 조문객들에게 배포할 예정이어서 정부 측과의 갈등을 예고하고 있다.

다음은 일기 전문.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2009년 1월 1일

새해를 축하하는 세배객이 많았다.
수백 명.
10시간 동안 세배 받았다.
몹시 피곤했다.
새해에는 무엇보다 건강관리에 주력해야겠다.
‘찬미예수 건강백세’를 빌겠다.


2009년 1월 6일

오늘은 나의 85회 생일이다.
돌아보면 파란만장의 일생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투쟁한 일생이었고,
경제를 살리고 남북 화해의 길을 여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일생이었다.
내가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2009년 1월 7일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2009년 1월 11일

오늘은 날씨가 몹시 춥다. 그러나 일기는 화창하다.
점심 먹고 아내와 같이 한강변을 드라이브했다.
요즘 아내와의 사이는 우리 결혼 이래 최상이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내 없이는 지금 내가 있기 어려웠지만
현재도 살기 힘들 것 같다.
둘이 건강하게 오래 살도록
매일 매일 하느님께 같이 기도한다.


2009년 1월 14일

인생은 얼마만큼 오래 살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얼마만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았느냐가 문제다.
그것은 얼마만큼 이웃을 위해서
그것도 고통 받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살았느냐가 문제다.


2009년 1월 15일

긴 인생이었다.
나는 일생을 예수님의 눌린 자들을 위해
헌신하라는 교훈을 받들고 살아왔다.
납치, 사형 언도, 투옥, 감시, 도청 등
수없는 박해 속에서도 역사와 국민을 믿고 살아왔다.
앞으로도 생이 있는 한 길을 갈 것이다.

◀ ⓒ故 김대중 前 대통령 국장 장의위원회.

2009년 1월 16일

역사상 모든 독재자들은
자기만은 잘 대비해서
전철을 밟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전철을 밟거나
역사의 가혹한 심판을 받는다.


2009년 1월 17일

그저께 외신기자 클럽의 연설과 질의응답은
신문, 방송에서도 잘 보도되고
네티즌들의 반응도 크다.
여러 네티즌들의‘다시 한 번 대통령 해달라’‘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다시 보고 싶다, 답답하다, 슬프다’는
댓글을 볼 때 국민이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
몸은 늙고 병들었지만
힘닿는 데까지 헌신, 노력하겠다.


2009년 1월 20일

용산구의 건물 철거 과정에서
단속 경찰의 난폭진압으로
5인이 죽고 10여 인이 부상 입원했다.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


2009년 1월 26일

오늘은 설날이다.
수백만의 시민들이 귀성길을 오고가고 있다.
날씨가 매우 추워 고생이 크고
사고도 자주 일어날 것 같다.
가난한 사람들,
임금을 못 받은 사람들,
주지 못한 사람들,
그들에게는 설날이 큰 고통이다.


2009년 2월 4일

비서관회의 주재.
박지원 실장 보고에 의하면
나에 대해서 허위사실을 공표한
한나라당 의원에 대해서(100억 CD) 대검에서
조사한 결과 나는 아무런 관계 없다고 발표.
너무도 긴 세월동안‘용공’이니‘비자금 은닉’이니 한 것,
이번은 법적 심판 받을 것.
그 의원은 아내가
6조 원을 은행에 가지고 있다고도 발표,
이것도 법의 심판 받을 것.


2009년 2월 7일

하루 종일 아내와 같이 집에서 지냈다.
둘이 있는 것이 기쁘다.


2009년 2월 17일
명동성당에 안치된 김수환 추기경의 시신 앞에서
감사를 드리고 천국영생을 빌었다.
평소 얼굴 모습보다 더 맑은 얼굴 모습이었다.
역시 위대한 성직자의 사후 모습이구나 하는
감동을 받았다.


2009년 2월 20일

방한 중인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으로부터 출국
중 전용기 안에서 전화가 왔다.
그는 전화로 1. 클린턴 대통령의 안부 2. 과거 자기 내
외와 같이 있을 때의 좋았던 기억 3. 나의 재임시의 외
환위기 수습과 북한 방문시 보여준 리더십 4. 다음 왔
을 때는 꼭 직접 만나고 싶다 5. 남편 클린턴 대통령도
나를 만나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힐러리 여사가 뜻밖에 전화한 것은 나의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 표명으로 한국 정부와 북한 당국에 대한
메시지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아무튼 클린턴 내외분의 배려와 우정에는 감사할 뿐
이다.


2009년 3월 10일

미국의 북한 핵문제 특사인 보스워스 씨가
방한했다가 떠나기 직전 인천공항에서 전화를 했다.
개인적 친분도 있지만
한국 정부에 내가 추진하던
햇볕정책에의 관심의 메시지를 보낸 거라고
외신들은 전한다.


2009년 3월 18일

투석치료.
혈액검사, X레이검사 결과 모두 양호.
신장을 안전하게 치료하는 발명이 나왔으면 좋겠다.
다리 힘이 약해져 조금 먼 거리도 걷기 힘들다.
인류의 역사는 맑스의 이론 같이 경제형태가 주도하
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이 헤게모니를 쥔 역사 같다.
1. 봉건시대는 농민은 무식하고 소수의 왕과 귀족
그리고 관료만이 지식을 가지고 국가 운영을 담당했다.
2. 자본주의 시대는 지식과 돈을 겸해서 가진 부르주
아지가 패권을 장악하고 절대 다수의 노동자 농민은
피지배층이었다.
3. 산업사회의 성장과 더불어 노동자도 교육을 받고
또한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노동자와 합류해서 정권
을 장악하게 되었다.
4. 21세기 들어 전 국민이 지식을 갖게 되자 직접적으
로 국정에 참가하기 시작하고 있다.
2008년의 촛불시위가 그 조짐을 말해주고 있다.


2009년 4월 14일

북한이 예상대로 유엔 안보리의 의장성명에 반발해
6자회담 불참, 핵개발 재추진 등 발표.
예상했던 일이다.
6자회담 복구하되 그 사이에 미국과 1 대 1 결판으로
실질적인 합의를 보지 않겠는가 싶다.


2009년 4월 18일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와 인척, 측근들이
줄지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노 대통령도 사법처리 될 모양.
큰 불행이다.
노 대통령 개인을 위해서도,
야당을 위해서도,
같은 진보진영 대통령이었던 나를 위해서도,
불행이다.
노 대통령이 잘 대응하기를 바란다.


2009년 4월 24일

14년 만에 고향 방문.
선산에 가서 배례.
하의대리 덕봉서원 방문.
하의 초등학교 방문, 내가 3년간 배우던 곳이다.
어린이들의 활달하고 기쁨에 찬 태도에 감동했다.
여기저기 도는 동안 부슬비가 와서
매우 걱정했으나 무사히 마쳤다.
하의도민의 환영의 열기가 너무도 대단하였다.
행복한 고향방문이었다.


2009년 4월 27일

투석치료.
4시간 누워 있기가 힘들다.
그러나 치료 덕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 크게 감사.
나는 많은 고생도 했지만
여러 가지 남다른 성공도 했다.
나이도 85세.
이 세상 바랄 것이 무엇 있는가.
끝까지 건강 유지하여 지금의 3대 위기 ─ 민주주의
위기, 중소서민 경제위기, 남북문제 위기 해결을 위해
필요한 조언과 노력을 하겠다.
‘찬미예수 백세건강’


2009년 5월 1일

이제 아름다운 꽃의 계절이자 훈풍의 계절이 왔다.
꽃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
마당의 진달래와
연대 뒷동산의 진달래가 이미 졌다.
지금 우리 마당에는
영산홍과 철쭉꽃이
보기 좋게 피어 있다.


2009년 5월 2일

종일 집에서 독서, TV, 아내와의 대화로 소일.
조용하고 기분 좋은 5월의 초여름이다.
살아있다는 것이 행복이고
아내와 좋은 사이라는 것이 행복이고
건강도 괜찮은 편인 것이 행복이다.
생활에 특별한 고통이 없는 것이
옛날 청장년 때의 빈궁시대에 비하면 행복하다.
불행을 세자면 한이 없고,
행복을 세어도 한이 없다.
인생은 이러한 행복과 불행의 도전과 응전 관계다.
어느쪽을 택하느냐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할 것이다.


2009년 5월 18일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이 내한한 길에
나를 초청하여 만찬을 같이 했다.
언제나 다정한 친구다.
대북정책 등에 대해서 논의하고 나의 메모를 주었다.
힐러리 국무장관에 보낼 문서도 포함했다.
우리의 대화는 진지하고 유쾌했다.


2009년 5월 20일

걷기가 다시 힘들다.
집안에서조차 휠체어를 탈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다.
좋은 아내가 건강하게 옆에 있다.
나를 도와주는 비서들이 성심성의 애쓰고 있다.
85세의 나이지만
세계가 잊지 않고 초청하고 찾아온다.
감사하고 보람 있는 생애다.


2009년 5월 22일

버마 혁명민주지도자 등 수 명이 내방.
민주화에 대해서,
나는“버마는 외국의 지지는 충분히 얻고 있으니 이
를 활용해서 안에서 국민이 자력으로 쟁취하도록 노
력하시오”라고 격려했다.


2009년 5월 23일

자고 나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다는 보도.
슬프고 충격적이다.
그간 검찰이 너무도 가혹하게 수사를 했다.
노 대통령, 부인, 아들, 딸, 형, 조카사위 등
마치 소탕작전을 하듯 공격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수사기밀 발표가 금지된 법을
어기며 언론플레이를 했다.
그리고 노 대통령의 신병을 구속하느니 마느니 등
심리적 압박을 계속했다.
결국 노 대통령의 자살은 강요된 거나 마찬가지다.


2009년 5월 24일

노 대통령 장례식을 정부와 측근들은 국민장을 주장
하는데 가족은 가족장을 주장해 결말을 못 보았다.
박지원 의원 시켜서‘노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살았고
국민은 그를 사랑해 대통령까지 시켰다. 그러니 국민이
바라는 대로 국민장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전했는데 측근들이 이 논리로 가족을 설득했다 한다.


2009년 5월 25일

북의 2차 핵실험은 참으로 개탄스럽다.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의 태도도 아쉽다.
북의 기대와 달리 대북정책 발표를 질질 끌었다.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 주력하고 이란, 시리아,
러시아, 쿠바까지 관계개선 의사를 표시하면서
북한만 제외시켰다.
이러한 미숙함이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의 관심을 끌게 하기 위해서
핵실험을 강행하게 한 것 같다.


2009년 5월 29일

고 노 대통령 영결식에 아내와 같이 참석했다.
이번처럼 거국적인 애도는
일찍이 그 예가 없을 것이다.
국민의 현실에 대한 실망, 분노, 슬픔이 노 대통령의
그것과 겹친 것 같다.
앞으로도 정부가 강압일변도로 나갔다가는
큰 변을 면치 못할 것이다.


2009년 5월 30일

손자 종대에게
나의 일생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이웃사랑이
믿음과 인생살이의 핵심인 것을
강조했다.


2009년 6월 2일

71년 국회의원 선거시 박 정권의 살해음모로
트럭에 치어 다친 허벅지 관절이 매우 불편해져서
김성윤 박사에게 치료를 받았다.


◀ ⓒ故 김대중 前 대통령 국장 장의위원회.

◀ ⓒ故 김대중 前 대통령 국장 장의위원회.


① 농경시대, 기계의 시대를 지나 지금은 '사람의 시대'

 

안녕하세요…  한겨레 신문을 읽다가 웹진 나비의 창간 기사에서 시골의사 박경철의 인생상담 코너가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바로 인터넷 접속, 고민 내용을 이메일로 보내라는 글을 보면서, 잠시 고민하다가 용기 내어 이메일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38살/여자/대졸/싱글/백수입니다. 저는 기업의 도서관 사서로, 10년 정도 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능동적인 사서가 아니라 수동적인 사서의 역할에 한정되어 있었고, 달리 길이 보이지 않음을 느꼈습니다. 그때 서른을 넘은 나이였기에, 장래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 한의대 진학이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최선을 다해 수능을 공부했지만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하지만 밑바닥까지 잠재해있던 에너지까지 다 소모했기에 후회도, 한 번 더 하고 싶다는 미련도 없었습니다.

 

거의 1년 넘게 백수로 지낸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다시 취직을 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채용사이트에 올려 둔 이력서를 보고 헤드헌터의 연락을 받게 되었고, 한 회사의 자료실을 만드는데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2년 계약직이나 여러 조건들이 나쁘지 않았기에 입사하였고, 자료실을 만들고 나서 저는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또 백수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즈음, 저의 재취업에 도움을 주었던 그 헤드헌터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취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터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헤드헌터는 백수인 저에게 같이 일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녀는 개인사업자였습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생소한 일이었지만, 도전하였고 처절하게 이용만 당하고 또다시 백수가 되었습니다. 1년 반 동안 그 헤드헌터와 일을 하면서, 인간에 대한 실망과 저 자신의 멍청함과 순진함에 아직까지도 스스로 자학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이 막장이 되니, 이제는 막장 인생들을 만나는구나, 라는 자괴감마저 생겼습니다.

 

현재, 저는 7개월째 백수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헤드헌터를 그만둘 당시에는 직업상담사 자격증(*헤드헌터 사업자를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자격증)을 따서 내가 사무실을 내고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개인사업체를 내는 것은 성공의 확률보다 실패의 확률이 더 클뿐더러, 내게는 너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진 경력이라고는 사서 경력이라 그 경력으로 취업을 하려고 보니, 나이가 너무 많고 모든 취업 대책은 청년실업에 맞춰져 있습니다. 제 경험으로도 알 수 있지만, 나이가 많다는 것은 정말 치명적인 취업의 걸림돌입니다. 혹시나 나와 비슷한 사례가 있을까… 찾아봤지만, 저와 같은 사례는 없었습니다. 골드미스들은 나름의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장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무덤을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 구실 못한다는 것이 바로 돈을 벌지 못하는 것임을 너무 잘 배우고 있습니다. 누구 하나 저를 도와줄 이도 없고 기대하지도 않기에 혼자서 먹고 살 방법을 찾아보지만, 길이 안 보입니다. 직업상담사 자격증 시험 결과를 기다리지만, 자신이 없습니다. 설령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딴다 한들 또 다른 길이 있을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평생을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요?  제가 지금 다시 직업을 정한다면 평생 먹고 살 직업일 텐데…  도무지 길이 안 보입니다.  최저 임금이라도 받기 위해 여러 군데 지원해 보지만…  정규직은 아예 기회조차 없고,  비정규직에 지원해 보지만 연락이 없습니다.

답답하고 융통성 없고, 멍청한 인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제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조언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님의 글을 보고 인간이 자존감을 가진 개체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생각해 봅니다. 원시시대 인간이 자연과 협력하던 시절에는 인간은 생산의 전 과정에 개입했습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거두고, 길쌈을 하고 가축을 기르며 살던 시절에는 삶을 지배하는 것은 나의 의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대를 거치면서 인간은 과정의 일부에만 개입할 수 있습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이를테면 컨베이어 벨트에서 내가 조립하는 부품은 단지 완성품의 일부를 담당할 뿐 나는 어떤 성과물도 스스로 낼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은 기계를 만들었고 자연과학은 기술을 발전시켰지만 그만큼 인간이 소외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자존감을 느끼기란 어렵습니다. 끊임없는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일해야 하기 때문에 개별적 인간으로서의 나의 가치는 사실 기계부품보다 못한 가치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셈입니다.

 

아마 님이 사서직을 그만두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이유일 것입니다. 부정적 의미로서의 ‘대중’을 거부한 것이죠. 사회과학이 아닌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대개 ‘대중’이라 불리는 단일기호로 표시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대중’이란 말은 참 두려운 말입니다. ‘대중’은 표준화된 용어죠. 나도 너도, 우리도 아닌 ‘대중’은, 지배받거나 지도받지 않고서는 혼자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가혹한 존재를 가리킵니다. 과거에 비하면 지구상에 어마어마한 잉여자산들이 넘쳐나게 되었지만 어떤 조직, 기업 단위에 속하지 않으면 우리는 생존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됩니다.

 

즉 대중은 시스템에 속해야만 살아남는 존재인 셈입니다. 그러니 고통스럽습니다. 당장 하루하루가 나 자신의 실존적 결단에 의존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게 부여된 임무를 소화해야 하는 일원이니까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고 때로는 약간의 축적된 자산을 이용해서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물론 심한 경우에는 마약을 하거나 파멸적인 향락에 빠져들기도 하지요. 고통을 잊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도피입니다. 그야말로 그 순간일 뿐, 돌아서면 우리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대중이라는 자각은 그로부터의 소외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하는 역설로 기능 합니다.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니까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실존적인 삶을 택하기 위해 농장으로 내려가거나, 공동체를 꾸려 살아가며 자신의 가치를 구현하고자 노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을 떨친 사람들의 몫입니다. 여전히 두려움을 가진 채 낙향하여 농사를 짓다 보면 더 큰 공포가 다가옵니다. 기약할 수 없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시스템 속에 머무르게 됩니다. 혹은 정점에 이르기 위해 피나는 경쟁을 합니다. 물론 그 경쟁은 불공정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불공정성은 강화될 것입니다. 이것이 기계문명이 가져다준 혜택과 저주의 양면성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님은 처음에 실존적 삶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기업의 사서라는 직책이 전문성을 살려주기보다는 그야말로 관리업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것은 님에게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주었던 것입니다. 대개 ‘대중’은 이 시스템에 순종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시스템을 벗어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데 님은 결행했습니다. 저는 그것만으로도 님은 남다른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님은 큰 ‘용기’가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그 결행의 결과 두려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이유는 시스템을 벗어나기 전에 충분한 준비가 이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님이 자료실을 만드는데 참여했다면 그것은 자료실이 만들어지는 과정까지 일이었을 뿐, 한시적인 역할이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2년간의 과정에서 다른 준비를 했어야만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이 시대의 삶의 양식입니다. 어쩌면 그 뒤로 돌아가서 충분한 준비를 한 다음 사서직을 포기하는 것이 순서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님은 선택했고, 그다음에 님이 선택한 길은 적정해 보입니다. 헤드헌터업을 도우면서 실무를 배우고 그것을 기반으로 스스로 헤드헌터를 하겠다고 시작하신 것이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열심히 일했지만 어느 순간 배신당했다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위로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상 가능한 일이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보면 과거 직업은 모두 도제였습니다. 수십 년 일하고 배운 기술로 독립하거나 물려받는 것이 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기계나 컴퓨터를 이용하므로 도제 기간은 짧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모든 과정은 여전히 도제의 틀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꽃가게를 낸 플로리스트, 빵집을 차린 파티세리, 조리사 자격을 따고 주방에서 일을 배우는 조리사 등 모든 이들이 얼마나 혹독한 과정을 겪는지를 알아보면 그분들이 얼마나 존경스러운 분들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분들은 그 과정을 이기고 실존적 성취를 이루어냈습니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신의 힘만으로 스스로 결정하고 살아갈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물론 그분들이 이룬 각각의 성공과 실패라는 결과는 제쳐놓고 ‘삶의 양식’에 관한 문제를 가리키는 것이죠. 한데 님은 이 부분에서 작은 선택의 오류가 있었습니다. ‘헤드헌터’업은 인맥과 광범위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상대가 쉽게 전수 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애당초 불가능 한 일이고 그쪽에서 님을 실용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적절한 임금을 지급함으로써 대가를 치렀다고 여길 것이고요. 혹은 일을 가르친다는 미명하에 적은 임금으로 님을 고용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것이 어느 쪽이건 상대는 님에게 미안해하지 않을 것입니다.[각주:1]

 

그럼 님은 어땠어야 할까요? 답은 드리지 않아도 짐작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이제 님에게는 ‘결단’이 필요해 보입니다. 헤드헌터업이 적성에 맞고 사서직보다 ‘나’에게 자긍심을 준다면 도전하시면 됩니다. 물론 미래가 두려우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 잡고 업계는 사서직의 경험밖에 없는 미혼여성에게 호락호락 기회를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다른 분야들은 어떨까요? 어느 곳도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고민입니다. 님은 사표를 던지는 순간 이미 ‘가상’이 아닌 '실재'를 선택했습니다. 안정적인 경제적 자유 대신 ‘나’를 되찾기 위해 격랑이 이는 바다에 몸을 던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뚜벅뚜벅 그 길로 걸어가십시오, 그러다 파도를 만나면 바위에 ‘쾅’하고 부딪히십시오. 부서지고 터지고 깨지고 다리가 부러지고 피를 흘리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각오가 아니라면 님은 스스로 자신에게 상처만 내면서 귀중한 시간들을 허비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님을 위로할 시간이군요. 지금 우리는 농경시대, 기계의 시대를 건너 사람의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시스템의 지배자들은 시대의 거대한 변화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기계문명의 생산성은 극점에 달했고, 그만큼 재화의 산출 속도는 빨라지며 시스템의 지배자들도 스스로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살아남을 자는 사람시대의 도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미시적으로 보면 님이 나이를 걱정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인류의 평균 연령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자기완성, 자기성취, 스스로의 힘으로 성과물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최소 10년의 세월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을 길다고 여기지 말고 님이 10년간 무릎걸음으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손을 맞잡으십시오. 그렇게 하면 나중에 언젠가는 님의 상처가, 아니 상처의 흔적이 이웃들에게 자랑스레 보여줄 수 있는 훈장이 될 수 있습니다.

 

타인에게 상담을 한다는 것은 무례한 일입니다. 스스로도 책임질 수 없는 인간이 타인의 삶에 조언을 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님이 지금 하시는 일을 계속하라거나 그만두라거나 다른 일을 하라거나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님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누구도 자신을 대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님의 성취를 믿습니다. 아니 솔직히 믿고 싶습니다.

 

님은 누구보다 당당한 분이지만 두려워하고 있을 뿐입니다. 님이 앞으로 10년 후 오늘을 돌아볼 때를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님은 이미 삶의 당위성을 내 삶의 가치 안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때문에 그 순간의 용기를 잃어버리고 두려워하고 있는 ‘불안’이 님의 가장 큰 적입니다. 진심으로 같이 믿어보고 싶어집니다. 앞으로는 ‘사람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사실을요. 제 말에 동의하신다면 먼저 자신을 깊이 사랑하고 아끼십시오. 그다음 주변의 사람들을 나만큼 사랑하려고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때로 내가 너무나도 힘들다고 여겨지면 충정로에 있는 구세군 무료급식소에 가서 하루쯤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당신의 헌신은 미소로 바뀌고, 그런 당신의 미소에 기댄 분들이 당신에게 조언을 구할 것입니다. 님의 용기는 그분들에게 큰 위안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시작은 그렇게 하면 어떨까요? 사회적 명망가나 유력인사들과 인맥을 쌓기 위해 밤마다 경영대학원을 전전하기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한 발짝부터이니까요. 다만 한 가지 추가하고 싶은 말은 그가 누구이든지 실패하는 이유는 100%에서 멈추기 때문입니다. 내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10%의 노력을 더 하고, 이쯤이면 포기해야 하는 순간에 10%쯤 더 인내를 발휘하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흔히 이루었다고 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결과는 진인사대천명이 아니겠습니까


  1. 평소에 시니컬한 친구를 대상으로 자기가 선택하려는 결정에 대해 물어보면 이러한 답변이 많다. 이것이 문제가 된다는 건 아니고, 그 두려움보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완벽하게 세워나간다고 생각하면 문제없을 듯 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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