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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cellaneous/People

연봉 18억 포기한 괴짜강사 이범

Good to Great 게시판 첫번째 주인공
엄청난 연봉을 포기하고 '무료 강의'에 나선 학원 강사
오래전 스크랩 해 두었었는데, 드디어 제 자리를 찾았다

아주 긴 인터뷰, 하지만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인터뷰



2008년 5월 13일 경향신문 인터뷰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id=17523&pt=nv


“한국의 학교교육은 무책임 교육의 전형”


수년간 대한민국 최고 스타 강사로 명성을 떨쳤던 이범(39)씨. 2003년 연봉 18억 원을 포기하고 무료 강의를 시작해 학원가를 발칵 뒤집어놓은 학원가 이단아다. 정상의 자리에 있을 때 은퇴했다고 하여 ‘학원가의 서태지’로 불리던 그는 지난 대선 때 정동영 후보의 TV 찬조연설을 하고, 총선 때 심상정 후보를 지지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가 두 후보를 도운 이유는 단 하나. 바로 교육정책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병폐로 꼽는 공교육 부실과 사교육 팽창의 틈새에서 큰돈을 벌던 그가 공교육을 바로잡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 또한 충분히 주목을 끄는 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교육의 현장에서 우리나라 공교육의 문제점을 누구보다 피부로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학교 교육은 무책임 교육의 전형’이라고 날을 세우는 이범씨를 만났다.

곰TV(www.gomtv.com)와 강남구청 인터넷 강의 사이트(edu. ingang.go.kr)에서 과학 강의를 하고 있는 이범씨를 만난 곳은 서울 대치동의 한 건물이다. 지인이 사용하는 사무실을 나눠 쓰고 있다는 그는 오후 2시를 훨씬 넘은 시각에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온·오프라인 교육업체인 ‘메가스터디’ 창립 멤버로 과학탐구과목 최다 수강생을 기록하며 한 해 18억 원을 손에 쥐었던 스타 강사는 예상보다 소박했다(그는 이외에도 수년간 강남 유일의 300석 강의실 마감, 오프라인 학원 동시 수강생 4500명 등록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수많은 학생 앞에서 명강의를 했던 저력 때문인지, 언변은 뛰어났고 논리적이었다.

그에게 가장 먼저 묻고 싶은 것은 그가 벌이는 무료 강의의 성과다. 그는 2004년 중순부터 EBS와 강남구청에서 무료 과학 강의를 시작한 데 이어 2007년 초부터는 곰TV에서도 무료 강의를 하고 있다. 그는 애초 곰TV의 경우 학생들의 반응이 뜨거우면 광고 유치 등으로 일정 시간이 흐르면 무료 강의 사업도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에 따르면 기대만큼의 성과는 아직 나오고 있지 않다. 그래서 대안을 모색 중이라고 했다.

“대학 광고 등이 자연스럽게 유치될 것으로 예상했는데 그렇지 않은 실정이에요. 대안으로 강의의 폭을 유료와 무료로 확대하려고 해요. 강사 중 유료 강의를 원하는 분에게도 곰TV의 문을 열어놓으려고요. 그렇지 않으면 곰TV의 교육 분야는 계속 적자를 감수할 수밖에 없어요. 물론 제 강의는 계속 무료로 진행돼요. EBS는 작년에 논술을 촬영했지만 올해는 아직 진행한 게 없어요. 추측이지만 대선 때 정동영 후보 TV 찬조연설을 한 게 문제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하지만 제가 정 후보를 지지한 것은 아니에요.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의 자사고 100개를 만들겠다는 공약을 비판하려고 나선 거예요. 정 후보 측에도 그렇게 이야기했고요.”

반면 총선 때 심상정 진보신당 후보를 지지하고 나선 것은 심 후보가 공약으로 내건 교육정책이 자신의 뜻과 정확하게 일치했기 때문이다. 경기 덕양 갑에서 출마한 심 후보는 덕양구를 ‘공교육 혁신특구’로 만들겠다며 자율형 공립학교를 근간으로 하는 일반계 고교의 혁신, 교육 프로그램의 개발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범씨는 “평소 좋은 교육의 지표로 세 가지를 꼽아왔는데, 책임 교육, 맞춤 교육, 창의적 교육이 그것”이라며 “이는 곧 핀란드식 교육과 맥을 같이 한다”고 말했다(관련 내용은 박스 안 기사).

학원강사로 누구보다 잘나가던 그가 2003년 10월 돌연 학원가를 떠난 것은 ‘마음의 병’ 때문이다. 숱한 견제와 질시가 범람하고 인간이기보다는 매출을 올리는 도구로만 기능할 것을 요구받는 학원가 생리에 분노와 울화가 통제할 수 없는 수준까지 치밀었다는 것이다. 은퇴를 결심하고 나니 평화로움과 행복감이 밀려들었다고 한다.

그가 인터넷 무료 강의를 생각한 것은,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당 사업을 벌이려고 하던 찰라, EBS와 강남구청에서 거의 동시에 무료 강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면서 그에게 강의 요청을 해왔다. 그는 관(官)의 안정적인 기반에서 폭넓게 지원받으며 무료 강의를 시작하는 것이 여러 면에서 긍정적이라고 판단하고 개인적으로 온라인 무료 강의 사이트를 만들려던 계획을 잠시 미뤘다.

여기서 궁금증 하나. 무료 강의만 하면 생계는 어떻게 이어갈까. 그는 “메가스터디를 그만둘 때 앞으로 수입이 없을 것을 예상해 건물을 하나 사뒀다”면서 “거기서 나오는 임대료와 교재 판매, 그리고 백화점 문화센터 강연을 통해 버는 돈이 있기 때문에 생계 걱정은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아버지가 전북대 생물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전주에서 9년간 살았다. 경기과학고에 입학하기 위해 중학교 3학년 때 수원중학교로 전학한 그는 이듬해 경기과학고에 입학했다. 수재들만 모인 경기과학고에서의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1학년 여름 무렵부터 한국과학기술대학(KAIST)에 조기 진학하라는 학교장의 압력으로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당시 과학고의 제 동급생은 2개 반에 모두 60명이었는데 1학년 여름부터 교장께서 한국과학기술대학의 학부과정에 과학고생들이 조기 진학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했어요. 하지만 전 누나 두 분이 서울대에 다니고 계셨고, 저 역시 서울대를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과학고에서 3학년까지 마치겠다고 했죠. 그랬더니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라고 하시더군요. 2학년 여름까지 담임선생님도 계속 닦달하는 바람에 심리적 타격이 컸어요. 게다가 당시 집안에도 어려운 일이 있었거든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1년간 혼자 버티면서 호주머니 속에 항상 신문사에 보낼 투서를 넣고 다녔어요. 결국 교장께서 포기하셨죠. 결과적으로 당시 동급생 60명 중 45명만 과기대에 진학했는데, 제 친구 4명은 일부러 오답을 표기해 시험에 떨어졌다고 해요.”

그는 고등학생 때의 경험이 이후 그의 인생에서 자신의 의지를 믿고 소신대로 밀어붙이는 삶의 태도의 디딤돌이 됐다고 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1988년 서울대 동물학과(재학 중 분자생물학과로 바뀜)에 진학한 그는 사진 동아리에 가입하고 대학신문에서도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학생 운동권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게 그의 얘기다. 마르크시즘 등 사회주의 사상을 학습시키려는 선배들과 다투고 신문사를 그만뒀을 정도다.

그러던 그가 사회 현상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것은 2학년 때 목격한 일이 계기였다. 대학신문을 그만둘 무렵인 1989년 서울 사당동 재개발 지역에 깡패를 동원한 철거단원이 식칼을 들고 주민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사진 동아리 친구들과 그곳으로 달려갔다.

“인생에서 불가피하게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있음을 깨달은 날이었어요. 가만히 있느냐, 맞서 싸우느냐의 기로에서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죠. 함께 간 국사학과 친구 두 명은 철거단원들이 휘두른 칼에 찔려 병원에 실려갔어요. 더 기막혔던 일은 경찰관이 오긴 왔는데 철거단원들과 몇 마디만 나눈 후 돌아간 점이었어요. 전 몸에 문신까지 한 깡패들과 경찰관이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촬영했고 그 사진은 한겨레신문에 실렸어요. 이 일은 제게 학생 운동권에서 하는 이야기가 뭔지 정확히 알아야겠다는 강한 동기를 부여했어요.”

3학년이 되면서 그는 서울대 84, 85학번이 운영하는 세미나에 참가했다. 마르크시즘 서적을 오역까지 찾아내며 엄밀히 연구하는 학회였다. 잇따라 3학년 2학기부터는 서울대 자연대의 ‘학회연합’에서 활동했다.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는 세미나팀들에 대한 지원 조직이다. 주로 강연회 개최나 커리큘럼을 정리해 제공했다. 이 같은 활동은 대학원에 진학해서도 이어지는데, 대학원에서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 과정을 공부한 그는 학부생들이 만든 계간지 ‘학회평론’의 편집자문위원으로 3년간 일했다.

그러나 이때도 운동권의 주류 이념인 주체사상이나 레닌주의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주체사상은 국가가부장제 이데올로기로, 그것을 수용하는 것은 몰상식한 일이라고 판단했고, 레닌주의 역시 민주주의자라면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이념이라고 결론 내렸다”고 말했다.

“전 학생운동에 반 발 정도 디딜까 말까한 수준이었어요. 하지만 그때 이미 운동권이 망할 것이라고 판단했죠. 비이성적으로 뭔가를 추종하려는 경향이 강했으니까요. 소련이 무너졌을 때 전 잘됐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류의 사회주의는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거든요.”

오히려 그가 관심을 기울인 것은 환경생태운동이었다. 생물학과 교수인 아버지가 읽는 환경 관련 잡지를 어려서부터 어깨너머로 본 영향이 컸다. 그 잡지에는 백로가 농약을 먹고 죽은 사진 등 환경이 어떻게 자연을 파괴하는지 보여주는 다양한 사진이 실려 있었다. 대학 4학년 때 서울대 내에 환경생태운동 동아리를 만들려고 준비했던 그는 동아리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 당시만 해도 환경이나 생태운동은 운동권에서 백안시되었기 때문에 동조하는 학생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적록연대’(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연대)라는 용어를 가장 먼저 쓴 사람이 자신이었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사교육 시장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은 석사과정 1학년 때다. 당시 과외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던 그에게 연구실 선배가 양재동에서 학교 선배가 운영하는 학원에서 과학 과목 강사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것. 당시 ‘경인학원’이라는 이름의 이 학원 원장이 현재 메가스터디 대표이사인 손주은씨다. 3개월에 걸쳐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문제집 한 권을 모두 강의해주는 게 그의 일이었다. 수강생 중에는 국내에서 첫손에 꼽히는 재벌그룹 회장의 손자도 있었다. 한 번 갈 때마다 당시로서는 큰돈인 10만 원씩 받은 그는 학원가에 상당한 규모의 돈이 흘러들어가고 있음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이후 박사 과정에 올라가면서 역시 아르바이트로 분당의 한 학원에서 강의를 했고 박사 과정을 수료하던 즈음에는 본격적으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단과 강의를 시작했다. 당시 여름방학 중에 가르친 학생만 300명에 이르렀고 수강료 총액은 3000만 원이었다. 단과 강사는 수강료 총액의 50%를 받기 때문에 그가 여름방학이라는 짧은 기간 중 벌어들인 돈만 해도 1500만 원이었다. 분당에서 유명강사가 된 그는 손주은씨의 주선으로 손씨가 강의하는 대치동 강남대일학원으로 이적하면서 스타 강사로 승승장구의 길을 걷는다. 1999년 여름방학 강좌에서 한 반에 250명씩 4개 반을 마감해 1000명을 가르치는 기록을 세운 것이다. 그가 연봉 10억 원을 훌쩍 넘긴 시점도 이때다. 대치동뿐 아니라 청담동, 서초동, 분당 등지에서도 강의했다. 그는 “‘한국 경제의 검은 구멍에서 내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2000년 7월, 손주은·조진만씨와 힘을 합해 ‘메가스터디’를 창립했다. 2003년 메가스터디를 그만두고 EBS와 강남구청에서 무료 강의를 시작하면서 그는 보유하고 있던 메가스터디 주식 22만 주 중 5만 주를 당시 장외거래가의 3분의 1 가격에 내놓아야 했다. 메가스터디는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코스닥에 등록됐다(당시 그는 5만 주를 9억 원에 넘겼다. 지금 현재 5만 주의 가격은 180억 원에 이른다).

그는 지난해부터 글로벌정치경제학연구소 설립을 준비 중이다. 주로 글로벌 자본주의의 변동을 연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제학·사회학·정치학 등의 구분 없이 학문을 연구하는 소장학자들이 주멤버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를 위해 100억 원을 출자할 계획이다.

“0교시수업, 학생 기본권 침해”

한국 공교육의 가장 큰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나.

“보수나 진보나 할 것 없이 교육 문제를 자율이냐 규제냐의 틀 속에서만 보는 게 문제다. 여기서 실종된 게 국가의 책임이라는 의제다. 교육은 국민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다. 국가가 국민에게 의무를 지게 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도 국가가 져야 한다. 국가의 책임은 크게 봐서 두 가지다. 우선 학생들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0교시 수업 등 학생의 기본권은 무수히 침해당하고 있다. 또 하나 국가가 책임져야 할 것은 최저 학력이다. 우리나라는 학교에서 가르치고 시험 봐서 등수 매기고 때 되면 학년 올려보내고 이게 전부다. 책임 안 지는 게 고질적으로 체질화되었다. 우리나라에는 분수의 개념도 모르고 중학교에 올라가거나 영어 L과 R 발음도 구분하지 못하고 때 되면 학년 올라가는 학생이 많다. 하지만 교육 선진국은 그렇지 않다. 제일 잘하는 데가 핀란드다. 핀란드는 학생 개개인의 학습에 대한 이해 수준을 철저히 점검해 가르친다. 최저 학력을 국가가 책임지지 않을 때 가장 피해를 보는 애들은 결국 교육 여건이 안 좋은 저소득층이다. 우리나라 교육 문제의 절반이 대학 서열화에서 비롯된 입시경쟁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학교 교육의 무책임에서 비롯된다.”

이명박 정부 교육정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인가.
“현 정부가 펼치는 교육정책의 핵심 낱말은 자율성과 다양성이다. 자율성을 내세운 대표적인 정책이 대학과 자사고가 학생 선발권을 행사하도록 한 것이고, 다양성을 앞세운 대표적 정책이 자사고를 100개 만든다는 고교 다양화 정책이다. 하지만 정부가 옹호하는 것은 개인이 아닌 집단(학교)의 자율과 다양성이다. 교육의 가장 중요한 참여 주체인 교사와 학생 개개인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높이는 정책은 찾기 힘들다. 특목고와 자사고를 늘린다는 것은 중학생들을 성적 위주의 입시경쟁으로 내몰고, 고질적인 야간 타율학습을 강화하는 것이다. 자사고 설립은 고교 서열화를 불러오고 사교육시장을 더 팽창하게 만들 것이다.”

좋은 교육은 어떤 것인가.
“심상정 후보를 도우면서 좋은 교육에 대한 지표 세 가지를 갖게 됐다. 책임교육과 맞춤교육, 창의적 교육이다. 책임교육은 앞서 말한 국가의 책임을 말하는 것이다. 숙제만 학생 개개인에 따라 맞춤형으로 차별적으로 내줘도 변화를 얻을 수 있다. 오해받기 쉬운 게 맞춤교육인데, 수준별 이동 수업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 논란에 두 가지 공백이 있다. 수준별 이동 수업에서 학생의 선택이 가능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우열반의 또 다른 형태라는 사실이다. 지금처럼 학교가 학생들을 수준에 따라 나누는 것은 문제가 있다. 또 한 가지는 교육과정이 획일화돼 있다는 점이다. 과목이나 깊이, 속도를 다양하게 마련해 학생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육과정이 획일화되고 속도도 같은 상태에서 수준별 이동 수업만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영국의 일부 학교에서도 수준별 이동 수업을 하지만 학습 수준이 떨어지는 반의 경우 학생 수를 더 적게 배정하고, 우수 교원을 투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