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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Science/History

왜란 개전 이틀 후 동래성 전투

동래성 전투

-병참기지를 사수하라!

-고립화 전략과 호접진蝴蝶陣(부채를 활용한 지휘법) 전술에 말려든 조선군

■ 동래읍성

① 동래부 동헌(동래시장 내에 위치)

동래부 동헌은 1636년(인조 14년) 동래부사 정양필이 창건하고 1711년(숙종37) 동래부사 이정신이 충신당忠信堂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일제시대에는 동래군청 청사로, 1973년 동래군이 양산군으로 편입되면서 양산군 보건소 동부지소로 활용되었다.  

 

② 충신당忠信堂

관아 건물이 다른 고을에 비해 규모가 컸었다고 하나 일제시대 때 대부분의 건물이 철거, 이전되어 현재 부산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단일건물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유일한 동헌이다.

③ 북문에서 서문 방향으로 바라본 전경

7년 전쟁(1592~1598년) 당시 동래읍성의 북문은 이곳이 아니다. 북문과 아울러 서문, 동문 역시 1731년에 확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7년 전쟁을 다룰 때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사진 제공 : KDN 자주국방네트워크 조직실장 조현근

■ 동래읍성 규모

문헌에 보이는 동래성은 1021년(고려 현종 12년)에 현재의 수영구 망미동 일대에 쌓았던 것을 김해부사로 있던 원수 박위가 1387년(고려 우왕 13년)에 현재의 동래시장 일대에 쌓았다. 1447년(세종 29년) 동래 현령 김시로가 둘레 약 937m(3,090척, 1척=30.303cm)(가로, 세로 230m쯤), 높이 약 4m(13척)로 신축하였고, 이때의 우물이 6개 있었다고 한다. 7년전쟁(1592~1598,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의 전투를 상상할 경우에는 이 규모를 고려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현재 인터넷에 많이 유포되어 있는 북문, 북장대, 서장대, 동장대, 인생문, 충렬사 등은 7년 전쟁 이후에 신축한 것이며, 현재의 동래성은 1731년(영조 7년)에 당시 동래부사였던 정언섭이 평지에 있던 성을 마안산(현재의 북장대가 위치한 산, 148m, 복천고분군을 내려다 볼 수 있음)과 망월산(현재의 동장대, 충렬사가 위치한 산)까지 평산성(평지성과 산성의 결합 형태) 형태로 약 5.24km(17,291척)만큼 새롭게 넓힌 것이며, 이때 정언섭이 땅을 파면서 발견된 유해와 유구들을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글이 '여지집성輿地集成’'에 실려있고, 또한 그 자리에 '임진전망유해비'를 세워 놓았다.

① 지도로 보는 7년 전쟁 당시와 1731년 당시의 동래읍성 비교

경남문화재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있는 그림을 토대로 재정리한 것인데, 7년 전쟁 당시 읍성의 남문, 동문, 북문, 서문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림에서 '현재까지 추정된 읍성 체성'이 7년 전쟁 당시의 읍성 규모일 가능성이 크다. 이를 토대로 남문은 현재의 남문 자리, 서문 역시 현재의 서문 자리이지만, 북문은 우성베스토피아 아파트 아래 혹은 동래시장 위쪽의 사거리, 서문은 내성초교 아래의 사거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② 모형으로 보는 7년 전쟁 당시와 1731년 당시의 동래읍성 비교

KDN 자주국방네트워크 조현근 조직실장이 제공한 모형 위에 7년 전쟁 당시의 추정 읍성과 해자를 그려넣었다.

모형 사진 제공 : KDN 자주국방네트워크 조직실장 조현근

③ 동래부순절도를 통해본 동래읍성

동래부순절도와 부산진순절도는 원래 1709년(숙종 35년)에 동래부사 권이진이 화공에세 그리게 한 뒤 동래성 남문 비각 좌우에 걸었는데, 채색이 흐려지자 1760년(영조 36년)에 동래부사 홍명한이 화원인 변박에게 베껴 그리게 한 것이다.

아래의 그림은 변박의 동래부순절도를 토대로 2005년 4월 경남문화재연구원이 동래읍성과 관련된 지표조사를 하던 중 7년 전쟁과 관련된 유구가 나오고 그 이후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2005년 7월~2008년 1월까지), 2008년 11월 21일과 28일 2회에 걸쳐 경향신문의 부산지역 이기환 선임기자가 기고한 기사이다.

참고 : 동래읍성 上 :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11211728525&code=900305

        동래읍성 下 :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11281747395&code=900305

① 즉시 길을 비키라는 왜군의 회유에 맞서 “싸워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假道難)”는 내용을 쓴 목패를 던지는 송상현 부사. ② 겁을 먹고 도망가는 경상좌병사 이각. ③ 왜병에 의해 성이 함락되는 모습. ④ 송상현 부사의 순절 직전 모습. 조복을 입고 임금을 향해 절을 올린 뒤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⑤ 동래부민 김상과 아낙 2명이 왜병에게 기와를 던지며 싸우고 있다. ⑥ 적이 떠난 뒤 죽은 김상과 아낙 둘, 그리고 왜병 3명. ⑦ 송상현의 애첩 김섬이 자리를 피하다 잡혔지만 사흘 동안 왜병을 꾸짖고 욕하다가 역시 살해됐다.|‘동래부사순절도’는 동래성 전투의 모습을 시간대별로 묘사하고 있다. 점선원안은 동래성 해자 발굴지점.(자료:육군사관학교 평가실 권소영 제공)

위의 사진을 보면, 사진에 일련 번호가 매겨져 있고, 설명이 추가되어 있다. 위의 사진 속 동래읍성이 '평산성'이라 하면, ③의 위아래에 있는 산은 각각 마안산과 망월산이 된다. ②의 이각이 도망가는 북문과 ③의 일본군에 의해 성이 함락되는 위치는 7년 전쟁 당시와 전혀 다르게 된다.

경남문화재연구원이 조사 당시에는 '해자'에 대한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한다. '동래부순절도'에 해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역사 전문가인 이들도 그림 한 장에 매몰되어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데, 비역사학자인 일반인들은 오죽 하겠는가? 7년 전쟁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자료가 오히려 7년 전쟁의 사실과 진실을 감추어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되짚어 보아야 한다.

동래부순절도는 어떤 과정을 통해 그려진 것일까?

현재 부산광역시 시립박물관에 있는 '동래남문비(동래충렬비)'는 1668년(현종 9년)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지은 글을 토대로 1670년(현종 11년)에 동래읍성 남문 밖 농주산(현 동래경찰서)에 처음 세워진 것이다. 그 이후 별사 앞뜰(1709년)→남문 안(1736년)→부산광역시 시립박물관(1796년)으로 옮겨졌다. 비문에는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다음날 전투에서 부산진첨사 정발이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일, 병사 이각의 비겁한 도망, 동래부사 송상현의 의연한 죽음과 비장 송봉수·김희수·향리 송백·교수 노개방·유생 문덕겸·양통한의 순절, 양산군수 조영규의 절의 등 왜병들과의 처절한 싸움내용과 동래부 군·관·민의 순국 충절을 기록하고 비를 세우기까지의 경위' 등이 적혀져 있다.

동래부순절도가 처음 그려진 시기는 바로 동래부사 권이진(송시열 선생의 외손:외가쪽 손자)이 화공에게 시켜 그리게 한 것으로, 비문이 별사 앞뜰에 있었을 당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권이진은 바로 송시열이 남긴 비문과 화공이 그린 최초의 동래부순절도를 보고 해설문을 남겼는데, 이 해설문은 7년 전쟁 당시 전라도 최초 의병장이라 할 수 있는 유팽로와 교류관계가 있었던 신흠(1566~1628)의 상촌집에 실려 있다. 상촌집은 1621년 신흠 자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직접 쓴 것을 시작으로 1630년부터 1636년까지 여러 번 출간하게 되고, 1765년에 본집 60권, 부록 3권으로 출간된다. 7년 전쟁을 이해하는데 신흠의 '상촌집'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권이진이 남긴 해설문은 이 때 실리게 된 것 같다. 이 사이에 1760년(영조 36년)에 동래부사 홍명한이 화원인 변박에게 재차 그리게 한다.

동래성 전투와 관련된 또 다른 사료는 '재조번방지'인데, 신경(1613~1653)이 쓴 책이다. 신경은 7년 전쟁을 겪지 않았지만, 병자호란(1636. 12~ 1637.1)은 겪은 인물이다. '재조번방지'에는 7년 전쟁 당시의 인물들이 남긴 글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1693년(숙종 19년)에 처음 간행 되었고, 1910년에 또 출간되었다. 동래성 전투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해 실리게 된 것(이양녀와 신여노의 이야기)은 이 시기가 아닌가 추정된다.

그러나 송시열 선생이 남긴 비문이나 동래부 순절도, 그리고 '재조번방지' 속의 동래성 전투 등은 그 당시의 동래성 전투의 전개 과정을 자세히 파악할 수 없으며, 또한 인물들이 많이 미화된 듯한 인상을 받는다. 결과를 궤어맞추는 기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늘 그렇듯이 국가안정을 위해 논공행상이 벌어지며, 사회안정과 백성 교화를 위해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는 기록물이 발행된다. 7년 전쟁이 끝난 이후 사회안정을 위해 조선초기에 간행된 '삼강행실도', '속삼강행실도'의 속편으로서 1617년(광해군 9년)에 유근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를 편찬하게 된다. 이 책은 18권 18책으로 되어 있는데, 1~8권은 효자, 9권은 충신, 10~17은 열녀에 대해 다루고 있다. 나머지 1권은 '삼강행실도' , '속삼강행실도'에 실려 있는 동방인 72인을 취사하여 부록으로 싣고 있다. 효자와 열녀가 압도적임을 알 수 있다.

1617년 이후에 간행된 서적들은 이 책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리라는 것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④ 동래성의 해자

동래부순절도에는 나타나지 않는 '동래성의 해자'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4년(1591) 7월 1일에 의하면, '호남ㆍ영남의 성읍을 수축하였다. 비변사가, 왜적은 수전에 강하지만 육지에 오르면 불리하다는 것으로 오로지 육지의 방어에 힘쓰기를 청하니, 이에 호남ㆍ영남의 큰 읍성을 증축하고 수리하게 하였다. 그런데 경상 감사 김수는 더욱 힘을 다해 봉행하여 축성을 제일 많이 하였다. 영천ㆍ청도ㆍ삼가ㆍ대구ㆍ성주ㆍ부산ㆍ동래ㆍ진주ㆍ안동ㆍ상주ㆍ좌우병영에 모두 성곽을 증축하고 참호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크게 하여 많은 사람을 수용하는 것에만 신경 써서 험한 곳에 의거하지 않고 평지를 취하여 쌓았는데 높이가 겨우 2 ~ 3장에 불과했으며, 참호도 겨우 모양만 갖추었을 뿐, 백성들에게 노고만 끼쳐 원망이 일어나게 하였는데, 식자들은 결단코 방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위에서 보면, 동래에 '해자'를 설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 부산진성 전투를 기술할 때 '해자'가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남원성에 '해자'가 있다고 기록하였다.

조선 정부는 7년 전쟁을 대비하여 성을 쌓으면서 성 주위에 해자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전쟁 대비의 기초이다. 7년 전쟁 동안 다른 읍성을 다룰 때 역시 문헌에 '해자'라는 기록이 명시되어 있지 않더라도, '해자'를 상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 동래부 인구와 동래성 병력 규모 추정

▼ 동래부의 인구 규모 추정

동래성 전투를 다룬 문헌 중에는 동래성 전투 당시 성 안에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2만명이 있었다고 하며(프로이스 일본사), 최근의 저서에서는 3천 5백 병력이라고도 한다(이순신과 임진왜란 2권, 이순신 역사연구회). 또한 경상좌도 병마사(육군 사령관) 이각이 울산 병영(사령부)에서 예하 지휘관과 병사 400여명을 이끌고 동래로 달려왔다고 한다(임진전란사,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민정중이 동래부사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1658-1659)에 쓴 것을 1668년에 간행된 '충열사지' 임신동래유사壬辰東萊遺事에는 이각이 보졸 '수백명'을 호출하여 조방장으로 하여금 상황을 살피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7년 전쟁 당시 동래부 인구 규모가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는 현재까지는 찾아볼 수 없다. 조선시대 전체 인구, 경상도와 전라도의 인구 비율, 읍의 인구 등을 비교하면서(동래성에 민간인이 어느 정도였을까 추정) 동시에 읍의 군 병력과 조선초기의 경상좌수영 전력 등을 비교해 보아야 한다(동래성에 주둔한 군 병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추정). 그리고 개전 초기부터 왜 일본군이 전라도로 진공해 들어가려 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토지의 세수 규모를 파악해 보는 것이 좋다. 이 부분은 전시체제하에서 군사행정(보급)과 관련되어 있다.

① 조선시대 인구

조선왕조실록과 기타 문헌에 나타난 인구통계는 '공인된 기록'이라기보다는 '참고자료'의 성격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년도

연호

인구

호수

비고

1393

태조   2년

301,300

-

평안도, 함경도 누락

1440

세종 22년

692,475

201,853

한성, 개성 누락

1519

중종 14년

3,745,481

754,146

 

1543

중종 38년

4,162,021

836,669

 

1639

인조 17년

1,521,165

441,827

 

1657

효종   8년

2,201,098

668,737

 

1672

현종 13년

4,655,611

1,205,866

 

1705

숙종 31년

6,138,640

1,370,313

 

1831

순조 31년

6,610,878

1,565,060

 

1889

고종 26년

6,510,995

1,569,642

 

1900

광무   4년

5,603,151

1,395,630

 

출처: 조선왕조실록, 통계청 도서관 장서, 한국통계발전사(1)

② 영남(경상도) vs 호남(전라도) 인구

연도 혹은 문헌

연호

영남

호남

영남 vs 호남 비율

1404년

태종   4년

98,915

39,151

39.6%

1454년(세종실록지리지)

단종   2년

173,759

94,248

54.2%

1645년

인조 23년

379,111

301,962

79.7%

1717년

숙종 43년

1,628,754

1,109,556

68.1%

1795년

정조 19년

1,576,829

1,162,659

73.7%

③ 읍의 인구

지역

연도 혹은 문헌

연호

인구

호수

비고

산청현(경남) 여지도서, 산청현읍지

영조      

8,989

2,114

 
비안현(경북) 1421

세종 3년

4,077

463

 
동래현(부산) 1454(세종실록지리지)

단종 2년

1,493

398

여성 제외
경주부(경북) 1454(세종실록지리지)

단종 2년

5,894

1,552

 

태종 15년(1415)에 주민의 호수를 기준으로 하여 천호 이상의 고을을 모두 도호부로 만들게 함

7년 전쟁 후 17년에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의 '동래맹하유감'에 따르면, '4월 15일에 평명平明에....송부사를 좇아 성중에 모였던 지방민들 같은 시간에 피바다로 변하고 쌓인 시체 밑에 투신하여 천백명 중에 한두명이 생명을 보전할 정도이며....'라 하였다.

1500년대 중반기에 접어들면, 백성들은 과도한 세금 부담으로 인해 유랑자가 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아래의 동래성의 병력 규모 ② 경상좌수영 전력(세종실록지리지, 1454)에서 자세히 설명된다.

부산진성 호수가 300호 정도인 점, 동래부 관할이 양산군, 울산군, 기장현 등이지만 이곳에 있던 백성들은 동래성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동래성 인근의 부산진성, 다대포진성, 서평포진성, 수영성 등에 거주하는 백성들 역시 동래성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 등을 감안하면, 동래성에 들어간 백성은 동래성 내에 거주하는 백성들일 것이다. 민간인 1,100명 혹은 그 이상이 동래성에 들어갔을 것이라 추정해도 무방할 것 같다.

▼ 동래성의 병력 규모 추정

① 각 읍의 병력

동래부는 군사 가지가 아니라 행정관청이다. 전쟁을 대비하여 병력을 증가시켰다 하더라도 여타 기지보다 더 많은 병력이 배치되었으리라 예단할 수는 없다.

조선시대 군 복무는 일정한 교대식에 따라 중앙 상번군(지방에서 서울로 와서 근무)과 지방 부방군(지방에서 근무)으로 복무하였다. 예를 들면, 경주의 '홍길동'이라는 사람이 1년에 한번(1월~6월)은 서울에 와서 근무하고, 또 한번(7월~12월)은 경주 자체에서 근무하는 것이다. 경주지역의 전체 군 병력을 4개로 나누게 되면 1명이 서울로 가서 근무하는 기간은 2년이 걸린다.

 

복무 기간

병력 편성

1번

총 병력

실제 병적 등록 병력

 
경주부

6개월 교대 근무

4번으로 편성

490명

1,960

1,500여명

 
 
경주부 동천 마을

총인구

장정(전투가능남자)

여자

     
 

260여명

116명

87명

     
 
 

호수

군정(해군)

언양현

249호

996명

사망자

도망자

노인층 제외

실제 동원 가능자

236명

238명

9

500여명

참고 자료 : 박의장 관감록 권 2, 언양현감 임훈 언양진폐소彦陽陳弊疏

경주부의 실제 병적 등록 병력은 박의장(7년 전쟁 당시 경주부 판관(현재의 부시장에 해당))의 기록에 나와 있다. '속오원군 일천오백여명 이금미망형유천명束伍元軍 一千五百餘名 而今未亡兄有千名'(박의장 관감록 권2)

7년 전쟁이 발발한 이후 기존의 국방체제인 중앙의 5위제도五衛制度와 지방의 진관체제鎭管體制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속오군은 7년 전쟁 당시 명군으로부터 입수한 척계광의 기효신서 紀效新書 속오법에 따라 1594년 10월에 유성룡이 건의한 전수기의십조戰守機宜十條를 각 도에 내려보내 시행하도록 한 데서 편성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박의장의 속오군 1,500여명이 경주부 전체 군 병력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연양현의 경우 1567년(명종 22년)에 이미 병적 기록부가 유명무실화 되었다. 원래의 병력수 절반이 소용없게 되었다.

② 경상좌수영 전력(세종실록지리지, 1454)

관별

정박처

함선(병선)

해군 병력

비고

좌도수군 도안무처치사

동래 부산포

33

1779

 
해운포 만호

동래

7

583

 
다대포 만호

동래

9

723

 
두모포 만호

기장

16

843

 
염포 도만호

울산

7

502

 
개운포 만호

울산

12

420

 
서생포 만호

울산

20

767

 

감포 만호

경주

6

387

 
통양포 만호

흥해

8

218

현재의 포항 두호동 일대
오포 만호

영덕

8

353

 
포이포 만호

영해

8

589

 

축산포 만호

영해

12

429

 
총계

 

146

7,593

 

함선(병선)은 대선, 중선, 소선을 합한 것임, 도안무처치사(후에 수군절도사)가 있는 수영(해군사령부)에는 대선이 3~5척 정도 있었음.

1454년(세종 36년)은 조선시대 500년 가운데 국방이 가장 튼튼한 시대였다. 150년 후인 선조 시기에는 평화가 200여년이 지속된 상태였다. 1500년대 중반(선조 임금 이전의 명종 시대)에는 군복무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 뇌물(그 당시는 포布)로 군복무를 하지 않았다(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 포를 납부하고 군 복무에서 제외된다). 이는 바로 지방의 하위직 관리와 중앙의 고위직 관리, 군의 하급 장교와 고급 장교 모두가 뇌물로 세상을 조롱하던 시기였다. 군 병력은 차츰 줄어들고, 줄어든 병력은 가족, 친지, 이웃에게 연좌가 되어 유랑자가 속출한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1555년(명종 10년) 을묘왜변이 터진다. 을묘왜변이 발발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진관체제를 유지하는데 근간이 되는 지역 인구가 없어졌기 때문에 국방체제를 진관체제에서 제승방략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7년 전쟁이 발발한 그 시점의 마을 인구는 감소되어 있었고, 함선과 병력 역시 감소된 상태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부산진성에는 병사가 600여명 있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수치일 것이다. 전함의 경우 이순신 제독이 1차 출전 때 주력선이 판옥선이 24척, 보조선인 협선이 15척이었다. 이순신 제독의 노력으로 사령부 자체의 함선이 13척 이상이었고, 각 예하 부대인 진과 포에는 판옥선이 1~2척밖에 없었다.

7년 전쟁을 다루는 현대의 저서들은 정발 장군, 박홍 사령관, 그리고 원균 사령관에 대해 초기 대응의 실패를 함선의 수에서 찾는다. 조선 초기의 예를 들면서 평화가 지속되었다 하더라도 100여척은 남아 있었을 것이라 예단해 버린다. 그리고 그 많던 함선을 모조리 물 속에 수장시켰다고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다. 설사 함선의 수가 100여척이 남아 있었다 하더라도, 침략 일시를 적어도 10일 전에 알아야 부산 앞 바다에서 무력 시위를 할 수 있다. 그 당시 경상도 최북단에 위치한 영해에서 부산까지 판옥선 속력으로 얼마나 걸리겠는가? 또한 승조원 수를 고려해야 한다. 이순신 제독의 경우에도 노잡이가 없어서 걱정을 했다. 전함을 운용할 수 없는 여건이라면, 전함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침략해 오리라는 것은 조선 정부도 예측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침략 날짜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기습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정발 장군도, 박홍 사령관도, 원균 장군도 대응할 수가 없었다. 초기 대응과 그 이후의 대응은 다른 것이다.

▼ 도별 세수 규모

지역

쌀(단위 : 석)

콩(단위 : 석)

세수액

비율

세수액

비율

세수액

비율

경기도

2,631

4.9

2,731

9.4

5,362

6.5

경상도

9,817

18.3

6,474

22.2

16,291

19.7

전라도

28,849

53.8

11,327

38.8

40,176

48.5

충청도

12,184

22.7

8,385

28.7

20,569

24.8

강원도

167

0.3

284

0.9

451

0.5

총계

53,648

100

29,201

100

82,849

100

7년 전쟁 관련 서적을 접해보면, '호남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특히 이순신 제독이 탁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흔히 내 놓는 카드이다. 그 당시 이순신 제독만 호남을 그렇게 여겼을까? 아니다. 경상감사였던 김수, 초유사였던 김성일, 도원수였던 권율, 기타 의병장들, 중앙 관료와 지방 관료들, 모두가 호남을 나라의 근본, 울타리라고 여겼고, 그러한 호남을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누구나 다 알고 있으며, 그러한 것을 실천하는 것은 탁월함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이순신 제독의 탁월함은 다른 것에 있다.

이순신 제독이 훌륭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가족들이 전부 전쟁에 참여했다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백의종군 했다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 당시 가족들 전부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야전 지휘관인 경우 백의종군을 이순신 제독만 했는가?

이러한 기준으로 이순신 제독을 평가하면 이순신 제독의 탁월함의 기준을 간과하게 되고, 이러한 기준이야말로 이순신을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미화된 영웅화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가 된다.

■ 동래성 전투

▼ 조선군 전력

① 전체 병력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는 동래성 전투에 함대의 수군과 운반요원, 매일 매일 뒤따라 도착한 신병이 참전하여 3만명 가까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4월 19일 일본 제3군 흑전장정黑田長政(구로다 나가마사) 11,000 병력이 김해성을 함락시켰다. 4월 18일에 일본 제2군 가등청정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 22,000 병력이 부산에 도착한다.

일본 제1군이 4월 13일 부산에 도착한 뒤 대마도에 대기하고 있던 제2군을 태우기 위해 수송선이 돌아간다. 4월 18일 제2군이 도착할 때까지 4~5일 정도 소요된다. 그 당시에도 대마도에서 부산까지 2일 반 정도 걸렸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1일 정도 소요되었다고 한다. 제3군이 제2군과 비슷한 시간대에 부산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제3군이 4월 19일 김해성을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한다.

동래성 전투에 일본 수군(해군)이 참전하였다고 하면 제1군과 해군은 4월 13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부산에 도착하게 된다. 제1군 병력 1만 8,000여 병력과 해군 9,000여명을 합하면 거의 3만 병력이 된다.

대마도에 남아 있는 일부 수송선과 부산에서 귀환한 수송선에 제2군과 제3군이 동시 혹은 비슷한 시기에 대마도를 출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전투 참전 병력

전사자(군인)

부상자

포로

 
  조선군 일본군 조선군 일본군 조선군 일본군 조선군  
프로이스 일본사

2만

3만

5,000

100

-

400

 

일본군의 경우 부산진성과 동래읍성 전투 포함한 숫자임
천형 서정일기

 

 

3,000

 

 

 

500

 

동래부의 인구 규모 추정 ①~④, 동래성의 병력 규모 추정 ①~②를 감안하여 보면, 동래성 전투 당시 3,000~5,000(군인과 민간인) 병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일본군의 경우는 2만~3만 정도의 병력이다(제1군만을 고려하면 2만 병력, 해군 포함하면 3만 병력이 된다).

전투 참전 명단

 

난중잡록

동래충렬비(1668년 송시열 비문)

상촌집

재조번방지

총지휘관 송상현 동래부사    
중위장 조영규 양산군수    
좌위장 이언성 울산군수      
조방장 홍윤관 -      
대장代將 송봉수   ○(비장裨將) ○(비장)  
  노개방 교수敎授    
  이소사 양첩 ○(일본으로 잡혀감)     ○(이양녀, 소실, 첩, 포로가 되어 바다로 건너감)
  만개 노비       ○(이양녀와 같이 포로)
  금춘 하녀       ○(이양녀와 같이 포로)
  급창 관노官奴      

비장裨將

김희수     ○(비장)  
  송백 향리   ○(이원吏員, 아전)  
  문덕겸 유생      
  양통한 유생      
  김섬 함흥 기생 이름은 없고, '첩은 북도 기생'이라고 기록   ○(함흥 기생)  
  신여노      
  김상 동래 백성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억만(사노私奴, 13세, 동래 동문 밖 연지동)이 기록되어 있다. 교수는 종 6품으로, 중앙에서 파견된다. 조선시대 목, 부 등에 목사, 부사가 파견될 때, 판관과 교수가 각 1명씩 파견된다.

해당 지역의 지휘관을 대신하여 지휘권을 갖는 것에 대해 대장代將과 가장假將이 있다. 난중일기에 보면,  대장代將은 주로 현령, 군수 등 문관직에, 가장假將은 만호, 첨사 등 무관직에 사용되고 있음을 볼수 있다. 여기서 대장代將은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없다. 이소사는 1594년에 소서행장과 경상우도 병사 김응서가 화평을 논의할 때 석방되어 돌아왔다.

군수 물자

 

무기

군량

수송

비고

규모가 큰 창고 16곳

활과 화살

이 외에 많은 물자가 천장 가득히 보관.

대포 6문 보리
화전火箭 말 사료  
화약통    

화전火箭이라 하면 일반 활에 불을 붙여 쏘는 화살로 인식되기 쉬우나 화전은 보통 화살대와 화살 촉 사이에 화약통을 연결하여 폭발하도록 만든 것이다. 명나라에서 들여온 것이 보통 명화전(이순신의 난중일기)이라 하는데, 후에는 일상적으로 화전이라 불렀다.

▼ 동래성 전투

진격(혹은 포위)과 공격, 그리고 함락 시간대

부산진성 전투는 정발 장군이 일본군의 탄환에 맞아 전사함으로써 끝이 난다. 부산진성 전투를 끝낸 14일, 일본군 본대는 부산진성에 그대로 주둔하고, 선봉대는 동래로 진격시킨다. 조선군의 배후 공격과 선제 공격을 차단시키기 위해 병력을 나누어 다대포와 서평포로 진격한다. 일본군이 다대포를 공격하자 첨사 윤흥신은 동생 흥제와 군관민을 이끌고 이들과 대치하다 전사하였다(왜란이 끝난 후에도 이 일이 알려지지 않다가, 160여년 뒤인 1761년(영조 37년) 경상감사(현재의 도지사) 조엄이 이 사연에 얽힌 자료를 찾아내어 조정에 올리니, 비로소 그의 충절이 드러나게 되었다).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 본대는 15일 부산진성을 출발하여 동래성에 도착했다. 다대포와 서평포로 진격한 일본군 역시 15일쯤에 동래성에서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

진입 혹은 포위

공격

함락

 

조선

송시열

송공행장宋公行狀

15일      

신도비명神道碑銘

15일      

충렬비기(忠烈碑記)

14일 15일    
민정중

임진동래유사(壬辰東萊遺事)

14일 15일    
조경남 난중잡록 14일 날이 밝을 무렵 -   14일 일기에 동래 함락으로 기록

일본

천형(天荊)(종군승)

서정일기(西征日記)]

13일   진시(오전 7-9시) 조선일력은 14일
프로이스 일본사 14일 14일 저녁 때   조선일력은 15일

② 방어와 진격 단계

단계

조선군

단계

일본군

1

송상현 부사는 침략 소식 듣고 백성들을 성 안으로 대피시키고 병사들을 소집하여 남문에서 지휘

3

일본군 선봉대는 4월 14일 부산진성 전투가 끝난 이후 당천에 주둔하고, 그 이후 동래성으로 향함. 동래성에서 부산진성으로 지원군 차단 역할도 한 것으로 추정됨.

2

15일 아침, 경상좌도 육군 사령관 이각이 병사 수백을 거느리고 동래성에 도착, 조방장 홍윤관에게 정찰 지시, 보고 받은 후 위세에 눌려 소산역으로 도망

4

일본군 본대가 도착하자 동래성을 포위하기 시작함

5

경상좌도 해군 사령관 박홍이 동래성으로 지원하러 옴

 

 

일본군이 동래성을 포위하기 이전에 동래부 위쪽에 위치한 동래부 관할인 양산군과 울산군은 각각 수령이 약간의 병사들을 소집하여 동래성에 도착한다. 육군 사령관 이각 역시 도착한다. 조방장 홍윤관은 이각 병마사 예하 부대라 할 수 있다. 반면 박홍 해군 사령관은 동래읍성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데도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황령산 봉수대를 지키고 있던 봉수군 '배돌이'로부터 14일 오전 7~9시 사이에 구두로 보고를 받는다.

4월 13일 저녁에 우암동 방향으로 진군한 일본군의 일부가 부산진성 전투에 참전하지 않고 동래성과 해군 사령부(수영)의 지원부대를 차단하기 위해 매복을 하였다면 동래성의 송상현과 수영의 박홍 지휘관은 부산진성을 지원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 또한 동래성이 포위되었을 때도 역시 동래성을 지원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

소서행장이 전략가라면 부산진성을 포위공격하기 이전에 다대포 방향, 동래성 방향, 해군 사령부 방향 등 세 방향으로 복병을 보냈을 것이다. 이는 바로 '고립화' 전략이다. 이 전략은 동래성 전투, 제 2차 진주성 전투, 그리고 남원성 전투에서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는 것으로 판명난다. 조선군의 입장에서는 지원군이 없는 '고군孤軍' 상태가 되어 버린다.

포위 단계

단계

조선군

단계

일본군

1

송상현 부사는 침략 소식 듣고 백성들을 성 안으로 대피시키고 병사들을 소집하여 남문에서 지휘

4

일본군 본대가 도착하고 동래성을 포위하기 시작함. 동래성 주변에 방화 명령 내리고, 동래성을 5겹으로 포위함

2

조방장 홍윤관이 남쪽 10리까지 정찰 후 귀대, 이각에게 일본군 동태를 보고함

6

동래성을 포위한 일본군 중 일부와 동래성 주변에서 방화약탈하던 일본군이 소산역 방향(이각 부대)과 수영 방향(박홍 부대)을 차단함

3

송상현 부사는 북쪽을 향해 재배하고 부채에 글을 남김

 

 

5

경상좌도 해군 사령관 박홍이 동래성으로 지원하러 옴

 

 

이순신의 전쟁 보고서에 포로인 억만(13세, 사노(개인집 종), 동래 동문 밖 연지동)의 증언이 있는데, 동래성을 다섯겹으로 포위하였다 한다.

많은 문헌에서는 송상현 부사가 북쪽으로 재배하고 부채에 글을 남기고, 일본군을 향해 질타한 시점이 치열한 공방전 혹은 전투가 끝나갈 무렵으로 묘사하고 있다. 일본군을 질타한 시점은 맞을 수 있으나 북쪽으로 재배하고 부채에 글을 남긴 시점은 아닐 것이다. 전투가 시작 되기 전에 전투 결의를 다지거나 유언을 남기는 법이다. 난중잡록에서는 '포위를 당하기 전'이라 했는데, 이 기록이 타당성을 가진다 하겠다.

   고성월휘孤城月暉, 대진불구大鎭不救 고립된 성에는 달빛만이 감도네! 이렇게 큰 진을 구원할 수 없네!

고성孤城은 '고군孤軍의 상태가 된 성城'이다. 송상현 부사는 이미 동래읍성이 고립되어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공격 및 함락 단계

단계

조선군

단계

일본군

1

송상현 부사 남문에서 지휘

3

방화 지시. 허수아비 제작. 지원병(해군, 보급병, 신병)은 빈곤 상태를 벗어나고자 약탈에만 전념

2

객사 앞에서 선조에게 예를 올리고, 글을 남김

4

허수아비를 긴 장대 끝에 매달아 성벽 포위하면서 성벽에 늘어놓음. 조선군은 기세에 눌려 성안에서 도망다니며 울부짖음

6

화살, 기왓장(격렬한 저항) 공격, 성벽 한쪽에서는 일본군을 물리침

5

사방에서 사다리 타고 성벽 공격

 

 

7

조선병사의 시야를 가리고 화살의 겨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긴 깃발을 대나무에 매달아 펄럭거리게 함. 성 안으로 진입하여 2시간 동안 격렬한 단병접전, 일본군 대도에 궤멸됨

허수아비 제작 - 적색 옷을 입히고, 머리에는 청색 모자를 씌우고, 등에는 적색 깃발 꼽고, 허리에는 장검을 꼽음

망궐례는 지방에 있는 신하가 임금에게 예를 올리는 의례이며, 이 의례를 올리는 장소는 객사(관)이다. 객관은 외국 사신이나 국내 관리들을 맞이하는 곳이며, 임금을 상징하는 패를 모셔놓고 예를 올리는 곳이기도 하다. 매월 첫째 날과 보름 2번을 올리는데, 선왕 제삿날 역시 망궐례를 올렸다.

단계 4에서 일본군은 현재의 동래경잘서(그 당시 농주산弄珠山 취병장聚兵場 남문 밖) 앞에서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달라(전즉전의 불전즉가아도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라고 쓴 목패를 내걸고 투항을 유도했는데, 송상현은 ‘싸워서 죽는 것은 쉬워도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라는 목패를 써서 결사항전의 뜻을 알렸다고 한다.

송상현이 전사하기 전에 남문 성루에서 갑옷 위에 단령團領(공무원이 평상시 입는 업무복인 상복)을 입고 관대를 하고 앉아 있다가 일본군이 송상현을 체포하려 하자 일본군에 대해 2가지 태도를 보였다고 하는데, 난중잡록에서는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하나는 송상현이 가죽신 신은 발로 두 번이나 차면서 '이웃 나라의 도리가 이런 것이더냐! 우리는 너희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너희는 왜 이런 짓을 하느냐!. 다른 하나는 일본군이 칼을 휘두르며 돌입하자 송상현은 활로 쏘아 죽였으며, 많은 일본군이 난입하자 장검으로 2명을 죽이고 전사하였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둘 중에 자기에 맞게끔 어느 하나를 취하여 자기의 논리를 주장하는 것 같다. 현재의 7년 전쟁 관련 서적들 중에도 이런 모습이 보인다.

다른 많은 저서에는 단령이 아니라 조복(매월 초하루와 보름, 왕, 왕비, 세자의 생일 때 입는 예복)을 입은 것으로 되어 있다. 단령(상복)을 입는 경우와 조복(예복)을 입는 경우 악세서리가 다르다. 난중잡록의 앞뒤 문장의 악세서리로 보아서도 단령이 맞고, 전투 상황을 보아서도 조복을 입을 필요는 없다. 어느 것을 입었느냐에 따라 송상현이 전투에 임하는 태도가 달라지게 된다. 이 부분은 향후 조사해 볼 필요가 있겠다.

송상현은 신여로, 김섬과 함께 동문 밖에 묻혔다.

그리고 140여년이 흘렀다. 1731년 동래성 전투의 고통이 얼마나 처절했던가를 우리 선조들에게 한번 보여주고는 다시 깊은 역사속으로 숨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275여년이 흘렀다. 410여년전 동래성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일본군 조총에 두개골이 함몰되었다. 대도에 의해 무참히 베어진 선조들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 그날의 조선

부산진성이 함몰되고 동래읍성이 무참히 궤멸되어 가던 4월 15일, 일본 침공 소식은 경상좌도와 우도 지역에만 전달되고 있었다. 박홍 해군 사령관은 4월 14일 오전 5~7시에 부산진성 함락 보고를 받고 오전 7~9시 사이에 일본 침공 소식을 타전했다. 4월 15일 파발마가 상주를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4월 11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을 받은 김성일이 상주에 도착하여 일본 침공과 함께 부산진성 함몰 소식을 듣는다. 당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조선 정부는 평화로운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박홍의 타전은 경상우병사 조대곤→경상우수사 원균→전라좌수사 이순신으로 전달되었다. 이순신이 부산진성 함몰 소식을 접한 것은 16일 오후 9~11시였다. 이것이 2번째로 날아든 타전이었다. 이순신에게 도착한 첫 번째 타전은 4월 13일 오후 3~5시에 가덕도 봉수군이 타전하여 가덕진 첨사 전응린→경상우수사 원균→전라좌수사 이순신이었다. 15일 오후 7~9시에 받은 첫 번째 타전이었다. 이순신이 첫 번째 타전을 받은 시간, 동래성은 함몰되고 있었다.

■ 역사적 진실

동래읍성 해자에서 인골이 출토되는 모습.  

동래읍성 해자에서 인골이 출토되는 모습

③ 유탄에 맞아 희생된 것으로 보이는 5살 미만의 유아의 인골.

④ 해자에서 확인된 20대 여성의 인골.

① 320㎡에 불과한 공간에 81~114개체의 인골이 유기되어 있었다(출처:경남문화재연구원)

③ 왜병은 어린이와 여성 등 힘 없는 백성들까지 죽여 해자에 무더기로 내던졌다.

④ 왜병이 꿇어 앉아있거나 고개를 숙인 이 여인의 머리를 위에서 두 번이나 칼로 벤 것으로 보인다(출처:김재현 동아대 교수)

KDN 자주국방네트워크 권순삼